1531년 10월 11일/쯔빙글리 전사 

 
제프리 브라밀리가 마틴 루터, 요한 칼빈과 더불어 "세 번째 종교개혁자"라고 불렀던 스위스 종교개혁자 물리히 쯔빙글리가 1531년 10월 11일 주그(Zug)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카펠에서 전사했다.

1481년 1월 1일 퉁겐베르그의 빌드하우스 지방에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쯔빙글리는 마치 종교개혁을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인물 같았다. 그는 종교개혁사에서 몇 가지 점에서 루터나 칼빈 못지 않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는 루터나 칼빈처럼 그의 종교개혁 사상 역시 철저하게 성경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1518년 후반 쥬리히 민스터에서 신부로 부름받은 그는 다음해 1월 1일부터 마태복음을 필두로 조직적인 성경주해를 시작하면서 이를 토대로 목회현장에 예리하게 적용하여 개혁의 토대를 놓았다.

둘째는 그의 개혁이 급진적이라고 우려할만큼 철저했다는 사실이다. 1522년에서 1526년 사이 그가 이룩한 개혁 가운데는 사순절 폐지, 성직자들의 결혼허용, 성경번역, 새로운 세례명, 미사비판, 성상의 권징제도 실시 등이 포함됐다.

셋째는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를 놓았다는 사실이다. 제프리 브라밀리가 지적한 것처럼, "신학적으로 쯔빙글리는 연옥, 선행을 통한 구원, 교권주의, 성례주의, 최고전통을 반대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의 구속사역, 참회론, 선택론 그리고 말씀과 성령에 의한 소명을 강조했다." 이처럼 쯔빙글리의 신학에는 개혁주의의 핵심인 하나님의 섭리론과 예정론이 맥맥히 흐르고 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0.0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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