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1월 14일/보수적 항일운동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도구로 삼았던 것이 신사참배였다. 그 과정에서 일차적인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한국의 기독교 학교들이었다. 일제는 소위 미션 스쿨에 재학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신사참배를 면제해 달라는 선교회의 청원을 기각하고 오히려 "신사참배를 불응하는 학생들의 명단을 올려달라"는 역청원을 학교 측에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하게 요구한 사람은 평안남도 도지사 야스다께(安武直夫)였다.

그는 신사참배가 기독교 신앙과 배치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1935년 11월 14일에 평안남도 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는 참석한 도내 교장들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명령했다. 기독교 학교에서 신사참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를 대표하는 교장들이 신사참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참석한 숭실중학교장 윤산온(G.S. McCune)과 숭의여자중학교 선우리(V.L. Snook), 그리고 순안 의명 중학교의 이희만 교장이 기독교 신앙 양심상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자 화가 난 지사는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임으로 금후에 불응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공문을 발송하며 위협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윤산온은 신사참배 문제로 교장직에서 파면되면서까지 "신사의 제식에는 종교적 요소가 포함된 것과 신사에서 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신앙양심상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것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보수적인 항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0.2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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