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부흥운동


그러나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깨달은 후 그 첫 주일 아침 우리 원산 감리교회 회중 앞에 서서 부끄럽고 당황한 얼굴로 나의 교만, 심령의 강퍅함, 그리고 믿음의 결핍과 또한 이것들이 가져다 준 많은 결과들을 고백하면서 그들은 처음으로 죄의 확신과 회개가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1904, Robert A. Hardie


이처럼 한국민족이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가장 치욕적인 고통을 경험하는 시기에 한국교회는 전에 없는 놀라운 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一九0三-七年 사이에 朝鮮의 큰 復興은 監理敎會에서 始作되여 가지고 長老敎會에서 그 絶頂에 達하게 되었다.”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전과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이 구체화되는 그 시기에 한국교회는 일련의 부흥운동을 경험한 것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청일전쟁 이후 일기 시작한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1903년에는 하디를 통해 원산부흥운동으로 촉발되었고, 이것이 다시 원산부흥운동의 저변 확대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으로 이어져 한국교회에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운동, 웨일즈부흥운동, 인도의 부흥운동과 견줄 수 있는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이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2년 후 1909년 일종의 전도운동인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영적대각성운동은 세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는 이 대각성운동이 당시 세계기독교계에서 일고 있는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포스터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나봇의 포도원”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의 패권주의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이고, 셋째는 한국의 부흥운동은 일차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사경회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세 개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적어도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로 특징되는 기도회나 사경회 기간 중에 발흥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있었던 기도회는 白樂濬 박사의 말대로 한국“부흥운동의 기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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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0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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