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숭덕, 숭인, 숭현)을 통한 대 사회,민족적 책임 구현

평양에 처음 장대현교회가 설립된 후 장대현교회에서 남문외교회가 분립되었고 이어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서문외교회, 연화동교회, 명촌교회가 분립되어 평양의 장로교회는 7개 교회가 되었다. 이들 7개 교회는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양의 복음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3․1운동, 진흥운동, 물산장려운동, 그리고 비드월프 박사를 초청 부흥회에 이르기까지 평양의 장로교회는 서로 뜻을 같이했다. 이 모든 것들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협력관계는 숭덕, 숭인, 숭현학교를 설립하여 이 나라의 장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모은 일이다. 평양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평양에 설립된 남학교인 숭덕과 숭인, 그리고 여학교인 숭현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처음부터 자녀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산정현교회는 이 일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번하이셀은 복음전도, 교육, 의료 선교가 하나의 트라이앵글처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도 편하설 선교사는 지속적으로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산정현교회에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숭덕학교
숭덕(崇德)학교는 1894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3명에 의해 평남 평양시 관후리에 처음 설립된 기독교 학교다. 이 학교는 1898년 봄 평양시 염전리(板洞)로
가운데 길선주, 그 왼쪽에 마포삼열, 오른쪽에 이길함
이전했다가 1901년 평양시 장현(章峴)에 460평의 부지에 건평 60평의 연와제 3층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던 1907년 1월 16일 수요일 김찬성 조사가 “천로역정”이라는 제목으로 숭덕학교 학생예배를 인도할 때 어린 학생들 가운데 강력한 성령이 나타났다. 학과 공부를 중단하고 오후 1시까지 예배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울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고 그 중 세 명의 학생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을 잃었다. 숭덕학교 학생들도 평양장대현교회에서 발흥한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을 공유한 것이다.
1908년에 보통과 4년 고등보통과 2년의 학제를 갖춤으로 고등과(중학과) 교육이 시작되었다. 1912년에 편하설 선교사가 이 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1913년 고등과 제1회 졸업생 박상순, 백신칠을 배출하였고 1914년에는 고등보통과는 4년제로 학제를 개편했다. 당시 6학급으로 편성되었고 재학생은 447명이었다.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교육, 학습과정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자조력, 박애심, 봉사정신, 희생정신, 협동정신, 자치정신의 생활화, 1일 1선 장려, 기도회 및 성경공부를 통한 신앙함양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1912년 숭덕학교 교장을 맡은 편하설 선교사는 산정현교회 교우들과 학교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이때 산정현교회 교인 조만식이 이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6월 21일부터 일주일 간 평양장로회연합부흥회가 개최되었을 때 27일 김익두 목사는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숭덕학교를 영원히 유지할 것을 촉구했다. 1920년 7월 3일 동아일보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의 급무는 교육이다. 지식 없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이다. 이 넓은 평양강산에 우리의 손으로 세운 완전한 중등학교 하나 없는 것은 산 곱고 물 맑은 금수강산에 똥칠을 함과 다름이 없으니 만일 여러분이 다 쓰러져 가는 숭덕학교 하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를 못하겠거든 차라리 모두 흐르는 대동강물에 빠져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생명을 죽이며 육체만 살아 움직인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평양의 장로교인들에게 대단한 도전을 주었다. 그의 설교에 감동받은 “남자들은 토지와 헌금과 시계 등 [헌]물과 부인들은 월자와 지환과 장도 패물 등을 연보한 것이 6만 원에 달”하였다. 숭덕학교 재건을 위한 노력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20년 8월에는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학교 설립을 위한 부흥회를 1주일 간 개최하여 서민층 교인들이 감동받고 헌금 패물을 내놓아 5, 6만 원의 기금이 모아졌다. 숭덕학교 고등보통과를 육성할 목적으로 경상리에 고등과를 위해 가교사를 마련하여 분립하였다. 1921년 3월 16일 제8회 졸업생 23명을 배출하여 총 졸업생이 167명이 되었고, 1922년 3월에 제9회 졸업생 48명, 1924년에 32명 그리고 1925년에 43명을 배출하였다. 1924년 10월에 창립 30주년을 맞게 되었다.

숭인학교
1922년 4월 숭덕학교는 고등보통과를 숭인학교라는 이름으로 분립하고 5년제 학제로 개편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강규찬 이름으로 설립 허가원을 제출했다. 3․1운동의 지도자로 지목받고 있던 강규찬 이름으로 학교 허가를 신청한 것을 총독부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총독부는 대표자 강규찬 1인으로는 설립허가를 내주기가 불충분하고 학교를 운영할 만한 뚜렷한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 설립을 불허했다.
강규찬은 오윤선, 이일영, 정일선, 정두현, 고진한, 윤원상, 박기봉, 박치록, 변인서, 길선주 등과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평양의 일곱 개 장로교회에서 1만 원씩 회비를 내는 것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숭인학교는 국내 유일한 한국교회 운영의 학교요 한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에 근거한 교육정신과 민족주의 배양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일제치하에서 요시찰 대상의 학교였으며, 그 허가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숭인학교는 계속해서 발전하였다. 평양의 일곱 교회가 재정지원을 하면서 1923년에 이르러 재학생이 5백 명에 이를 정도로 학교 기반이 매우 든든해졌다. 1923년 7월 학교가 발전함에 따라 부족한 공간을 위해 새 교사를 완공했다.
1924년 6월 29일에는 김익두 목사의 인도로 숭인학교 신축을 위한 대부흥회가 열렸다. 이때 토지 3만 1,400여 평, 헌금 7,466원, 순금 276돈, 은 1,900돈, 백미 회중시계 요기 등 도합 1만 천여 원에 이르는 헌금이 답지했다. 1925년 3월 336평의 연와제 양옥 3층의 교사를 준공하고 1,500평의 운동장을 완비하였다. 초대교장에 정두현이 선임되었고 1925년 3월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했다. 숭인학교 설립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조만식, 오윤선, 김동원은 총독부로부터 학교인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숭인학교는 조만식과 오윤선 이름으로 설립허가가 용이한 상업학교로 설립인가를 신청하여 1931년 1월 각종실업학교로 인가를 취득했다. 국내 유일의 민간 경영 실업학교가 된 것이다. 초대교장에 정두선, 설립자 오윤선, 이사장에 김동원, 조만식이 취임했다. “당시 일제 당국이 내거는 유자격 교장이란 일본에서 교육받은 자라야 한다는 조적을 내세워 독립 인사들을 학교장직에서 배척하였는데 조만식도 그런 경우에 속하여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교사는 자격증 운운하며 서서히 제거시켰다.”
숭인상업학교 학제는 5년제로 했고 갑을 학급에 120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1935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숭현여학교

숭현(崇賢)여학교는 1897년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평남 평양시 상수구리(上水口理)에 설립된 기독교 초등학교다. 평양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교회가 설립된 곳마다 여러 소학교가 생겨났다. 여러 곳에 흩어진 학교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태동된 것이 숭현여학교였다. 이 학교는 숭덕학교와 더불어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학교로 널리 알려졌다.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남자도사경회 마지막 날인 15일 화요일에 숭현여학교에서도 열린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임해 죄를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 학교는 보통과 6년 고등과 3년제의 학제로 운영되었고 초대교장으로 배위량(W. M. Baird)이 봉직하였고 장대현교회 서편 700여 평의 부지에 150평의 건평 한식 2층 교사 및 기숙사를 완비하였다. 1904년 제1회 졸업생 김신보(金信寶), 김애희(金愛喜) 두 명을 배출하고, 1913년에 신학제 보통과 제1회 15명을 배출한 후 1921년 3월까지 고등과 제16회, 보통과 제9회 졸업생이 이 학교 교문을 나섰다.
강규찬 목사가 시무하던 당시 숭현학교는 가장 명성을 날렸다. 1925년 10월 여성교육사업에 감동을 받은 평양시 수옥리에 거주하는 여성 독지가 백선행이 대동군 추자도(楸子島)에 있는 전답 2만 6천 평(시가 3만 원)을 학교에 헌납했고, 그 해 11월에는 평양시 박구리에 거주하는 여성 독지가 김영효(金泳孝)가 중화군 동두면 흑리에 소재한 토지 8천 평을 숭현여학교에 기증하였다.
1926년 9월까지 숭현여학교는 제21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총 632명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숭현여학교에는 9학급 292명(고등 42명 포함)의 재학생에 13명의 교사가 재직하고 있었다. 이 학교 교장은 초대 베어드, 2대 찰스 모리스(Charles D. Morris), 3대 마포삼열, 그리고 4대 김여필이다. 이 학교 1년 운영비 9천 원 중 상당액을 교회가 분담했다.

평양지역의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은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통해 한국교회와 민족의 지도자들을 양성할 뿐만 아니라 세 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정신에 기초 학생들을 혼신을 다해 육성했다. 이들 세 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3백여 명의 학생이 내는 수업료로는 학교를 운영할 수 없어 학교 운영비 상당액을 평양지역 일곱 교회가 분담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산정현교회사기”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자래(自來)로 평양부내(平壤府內) 7교회(장대현, 남문외, 사창골, 산정현, 서문외, 연화동, 명촌)가 연합하여 설립(設立)한 교육기관(敎育機關)이 있었다. 남학교(男學校)로서는 숭인(崇仁), 숭덕(崇德) 두 학교이었고 여학교(女學校)로서는 숭현(崇賢)학교가 있었다. 학생 수는 모두 합쳐서 三百여 명이었고 이 세 학교를 운영하기 위한 총 경비가 이만(二萬)여 원 가량이었는데 기본이식(基本利息)과 수업료(授業料)를 징수(徵收)하여 경비에 충당(充當)하고 그 부족액(不足額)이 七, 八천 원이었다. 이를 7교회가 분담(分擔)해 왔었는데 본 교회가 그 부족액수(不足額數) 千원의 큰 돈을 계속 분담하였다.

산정현교회가 매년 세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운영비 부족분 7천 원 중 천 원을 분담해 온 것이다. 이 액수는 사기가 “천 원의 큰 돈”이라고 표현한 대로 실제로 당시로서는 보통 큰 액수가 아니었다. 산정현교회 1년 예산이 3천 원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전체 예산의 3분의 1을 학교 운영 지원비로 지출한 것이다.
전체 7천 원의 부족분 중 재정적인 여유가 많은 산정현교회가 천 원을 부담했던 것으로 볼 때 7천 원의 금액을 일곱 교회가 천 원씩 나누어 분담했던 것으로 추론된다. 그렇다면 산정현교회만 아니라 평양시내 다른 교회들도 상당액의 금액을 지원한 것이다. 이처럼 평양의 장로교회들은 헌신적으로 교육사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기독교 정신을 가진 민족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겠다는 평양지역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장로들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특별히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는 이 일에 앞장섰다.
길선주 목사와 평양산정현교회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1923년 6월 4일 산정현교회 주일 예배 때 설교했고, 1924년에는 산정현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미 1년 전 산정현교회 주일 강단에서 큰 감화를 준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사경회를 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는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매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강규찬 목사는 한편으로 산정현교회가 장대현교회와 계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 일고 있는 기왕의 부흥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기를 원했다.
1923년 산정현교회 직원은 선교사 편하설, 목사 강규찬, 장로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흥삼, 최정서, 집사 김봉순, 김용흥, 장석주, 우정순, 오응백, 송민호, 유계준, 박용복, 이찬두 등이었다.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산정현교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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