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선교사 사경회와 존스톤의 입국


하디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열린 신년부흥 사경회를 앞두고 1905년 12월에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원산에서의 부흥운동의 역사가 평양으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은 1906년이었고, 그 불씨를 제공해 준 주인공이 하디 선교사였다. 그 해 평양에서는 여름과 가을 동안 연속으로 사경회가 열렸고, 시내 한국인들을 위해 특별집회가 열렸다. 1906년 8월 평양주재 선교사들이 하디 선교사에게 평양에 와서 일련의 모임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돌이켜볼 때, 1906년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주권은 상실되고 이미 일본이 전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주재 미국 선교사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국내의 정치적인 상황, 그로 인해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친구관계로 생각해 왔던 미국이“한국에 대한 일본지배를 서둘러 승인하자”국내 곳곳에서는 미국인들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윌리엄 뉴톤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의 증언대로“격렬한 반 외국인, 특히 반미(反美) 폭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였던 한국선교지가 정치적인 상황의 급변으로 위기를 만난 것이다. 영적인 성장이 심각히 침해를 받을 것을 우려한 선교사들은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성령의 역사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반미 폭풍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 현장을 지켜본 한 선교사의 말대로 그들은“그 폭풍에게가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그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한 주간 동안 함께 모임을 가졌다. 이미 원산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 중심 도구로 쓰임 받았던 하디 선교사를 초청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머니 로제타 홀과 함께 그 현장에 참석한 셔우드 홀이 지적한 것처럼,“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거나 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기의 가슴을 열어 듣는 이들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맞닿게 직선적이고 성실하게 설교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말씀에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하디의 설교는 평양주재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훗날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디의 설교는 그곳에 참석한 한 소년, 셔우드 홀의 인생관까지 바꿔 놓았다.“나는 그날의 설교에 감동했다. ……닥터 하디의 설교는 어린 내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그때 나는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그날 예배 후,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새해만 되면 언제나 새 설계를 세우곤 했지만 작심 3일로 끝나곤 했다. 내 의지만으로는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할 게 자명했다. 그러나 닥터 하디의 설교에서 영적인 힘을 얻어, 마음이 열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새 결심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다. 닥터 하디는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셔우드 홀의 고백은 하디의 이날 설교가 얼마나 모인 이들을 감동시켰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요한 1서를 하디와 함께 공부하면서 자신들과 한국교인들에게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평양에서 열릴 겨울 사경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도록 함께 기도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 모임을 통해 전에 없이 강한 힘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세례만이 자신들과 한국인 형제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자신들을 토로하면서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상황에서“승리하는 길은 비통의 눈물과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뿐임을 분명히”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생각들을 희망 없는 국가의 상황으로부터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옮기는 것이 교회와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곳에 참석한 선교사들이“성신(聖神)의 감동(感動)을 밧아 각기(各其) 죄(罪)를 자복(自服)하는 중(中) 이길함(李吉咸)”선교사가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하디의 사경회를 통해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이길함이 장대현교회로 돌아와 “평양교회제직(平壤敎會諸職)을 회집(會集)하야 일주일간(一週日間) 매야(每夜)에 요한1서(約翰一書)를 교수(敎授)하난 中 제직(諸職)들이 은혜(恩惠) 밧기를 시작(始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역사가 이길함 선교사를 통해 기왕의 영적 각성이 성숙한 평양 교회 교인들에게로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로부터 1개월 후 1906년 10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회 정기 모임을 곁들인 집회가 열렸다. 이 모임에는 길선주를 비롯한 평양 시내 한국인 지도자들도 대거 참석하여 실제적으로 한국인들을 위한 모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주강사는 웨일즈와 인도 선교지를 거쳐 한국에 온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이자 부흥사인 하워드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 목사였다. 이때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웨일즈와 인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을 받아 그곳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전해 주었다.


“존스톤이 전하여 주는 외국교회의 부흥사정을 들은 한국교회 교인들은 자기들도 그와 같은 은혜를 받고자 원하게 되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장대현교회 장로 길선주는 마치 그를 통해 다가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예비라도 하듯이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다. 한국장로교 선교회가 본국 선교부에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는 당시의 영적 분위기를 잘 반영해 준다:


선교사들에게 행한 그의 강의는 성령께서 듣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감동시켜, 그들에게 점점 더 놀라운 사랑과 간절한 기도열을 고취시켜 주었다. ……한국인들에게 행한 그의 강의는 또한 매우 유익했고, 그의 방문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과 성령의 역사를 갈구하는 이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는 임하는 법이다. 과거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백대로“성령이 동반된 그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다.”


8월의 평양 선교사 사경회를 비롯 8월과 9월에 열린 원산과 서울 선교사 사경회와 웨일즈와 인도 부흥운동의 소식을 가져온 하워드 존스톤의 입국은 부흥운동을 사모하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가져다 주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7 11:50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