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인구령운동의 발흥 배경

그토록 놀랍게 한반도 전역과 중국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평양대부흥운동의 열기도 1908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쇠잔해갔다. 1909년에 전반기에 접어들면서는 그 강도가 한층 더해갔다. 비록 교회 성장이 정지된 것이 아니었지만 전에 비해 그 속도도 한결 줄어들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민족복음화를 빠른 시일 안에 달성하겠다는 꿈이 마치 사라지는 듯 여러 방면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자들이 많았다. 이런 위기의식이 다시 한번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는 하나의 결집된 노력으로 발로된 것이 “백만인구령운동”이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발흥을 촉진시킨 사건은 세 가지 방향에서 흘러 나왔다. 1909년 여름 개성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간절한 기도운동, 거의 같은 시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운동, 그리고 같은 해 9월 한국에 입국한 일단의 해외 유명 부흥사들의 순회전도집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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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0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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