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출생지 산동성에도 불타오른 선교역사

1907년 독노회 조직 때부터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던 해외선교는 1912년 총회가 조직될 때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 결과 총회가 중국선교를 결정하고, 산동선교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클락의 말대로 “1912년 총회 조직이 완성된 후 총회의 최대 사업은 외국 선교사를 파송해 중국의 산동지역 사람들에게 중국어로 사역을 행하도록 결정한 일이었다.” 그래서 산동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907년 독노회 때 이기풍 선교사 파송을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선교헌금이 답지했던 것처럼, 1912년에도 전국의 교회들이 중국선교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여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틀을 다져 나갔다. 마침 산동의 북장로교 선교회가 청도(靑島)로부터 100마일 가량 떨어진 산동성 내양현(山東省 萊陽縣) 주변의 교회와 일부 지역을 한국선교사들에게 넘겨 주기로 동의하여 1913년 박태로(朴泰魯), 김영훈(金永勳), 사병순(史秉淳) 등 세 명의 선교사를 산동성에 파송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던 방지일 선교사의 말대로 산동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선교지역이었다:

중국인들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인 산동 사람들은 더욱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중국 문명의 발생지인 그곳에 가서 선교사역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동양문화에 대한 자긍심, 특히 유교적 틀에 박혀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1913년 11월 가족을 대동하고 산동성으로 떠났던 박태로 선교사가 질병으로 순직하고 나머지 두 사람도 본부와 연락도 없이 1917년 철수하면서 산동선교는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들을 대신하여 1917년 방효원과 홍승한 목사가,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가 파송되었고, 1921년에는 평도와 지마현의 일부를 선교구역에 편입시켜 선교지를 크게 확장했다. 1923년에는 평북 여전도회 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이대영 목사가 파송되었고, 1931년에는 김순효 여선교사가,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가 제 5대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들 외에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젊은 의사가 가세하면서 산동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19년 의료선교사 김윤식이 내양 남관에 개업을 하면서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1932년에는 의료선교사 안중호를 지마성에 파송하여 병원을 개설하는 한편, 내양에 애린학교, 지바에 애도학교를 설립하여 의료 및 교육사업에도 전념했다. 대구에서 파송 받은 조소임(1922), 이영애(1924), 편순남(1930)은 선교사 자녀 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매우 빨리 습득하여 1년이 지나면 중국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미 한문을 습득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중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 순회하고, 시장과 가정 그리고 노변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사경회도 개최했다.” 총회는 중국 산동 지방 주재 중국 선교부와 협의하여 한국선교사들이 맡을 선교지를 결정하는 한편, 이들이 가서 선교할 때에 새로 교회를 설립하기보다 중국교회와 협력하여 선교사업을 추진한다는 선교방향을 정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20년 산동노회와 산동의 미국 선교회는 한국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선교사역에 대해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또 하나의 거대한 인접 영역을 한국선교사들에게 넘겨 주었다. 1923년 말, 이들에 의해 591명의 중국인 세례자를 합쳐 815명의 교인과 25개의 예배 처소, 19개의 사립 학교와 436명의 학생들을 관장하는 비교적 큰 선교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곧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중국선교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 1933년 중국선교는 목사 4명, 장로 13명, 집사 39명, 남전도인 4명, 여전도인 8명, 교인 1,324명, 교회 51개, 소학교 7개의 교세에 단독 노회, 내양노회를 설립할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8년에는 청도 선교구를 신설하였고, 1942년에는 35개 교회, 세례교인 1,716명의 교세를 가질 정도로 산동선교는 성공적이었다.

북감리교 역시 1907년 복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지선교회를 조직하고 3년 후에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중국에 파송했다. 1909년 5월 11일 오전 9시에 정동감리교회에서 모인 감리교 연례회에서 기성의 “국내 선교회”를 “내외국(內外國) 선교회”로 개편하고 만주에 손정도를 파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결정은 1909년의 감리교 연례모임에서 가장 감사하고 축하할 일이었다. 남감리교도 1908년에 간도선교회를 조직하고 이화춘(李和春) 전도사를 북간도에 파송하여 장로교에 이어 남북감리교 모두 처음부터 중국선교를 중요한 교단의 정책으로 채택하고 실천에 옮겼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협력 하에 만주선교를 꾸준하게 전개해 이곳에서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1925년 지방회 1개, 구역회 6개, 감리사 1명, 교사 4명, 전도사 3명, 권사 16명, 교인 1,360명의 교세를 가질 만큼 감리교의 만주선교는 성공적이었다. 장로교의 여전도회와 감리교의 여선교회는 각각 6명, 5명의 여선교사들을 만주에 직접 파송하고 선교비를 지원했다. 장감이 동시에 시작해 한국의 해외선교를 대변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둔 만주선교는 복음을 한국 민족에게 확장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2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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