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대부흥

클락이 지적한 것처럼, 1901년부터 1907년까지 “복음 전파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복음 전도”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 결과 이 기간 동안 교회가 그야말로 놀랍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07년에 이르러 교인이 7만 5,000명에 이를 정도로 한국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와 같은 복음 전도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 방법은 전과 동일하였다. 거의 모든 선교사가 한층 더 넓고 끈질긴 순회 사역을 실시하였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들조차 주말과 방학 기간에 심방하는 순회 교구를 가지고 있었다. 시장에서의 전도 설교, 사랑방 사역, 여인숙에서의 복음 전파, 다량의 전도책자 배포, 부흥회, 특히 사경회 등 여러 전도 방식이 있었다. 온갖 종류의 복음 전파운동이 넓고 멀리 두루 시행되었으며, 어떤 시골 마을로부터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제 아무리 멀고 깊은 심산유곡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즉각 응답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아펜젤러에게서 찾을 수 있듯이 감리교 선교사들 역시 구령의 열정이 남달랐다. 백낙준 박사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한국에 파송된 장감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열의와 웨슬리의 열정을 지닌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복음의 빚진 자라는 철저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1895년 이후, 특별히 1906년과 1907년 사이에 교회가 급성장한 이유가 “복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선교사들의 복음의 열정은 라토렛이 수많은 한국 교회 성장 요인들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만큼 한국 교회 급성장을 가능하게 만든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장감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에 대해 열린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을 촉발했던 주인공이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였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산파 역할을 했던 곳이 장로교의 장대현교회였다는 점에서 장감 모두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은 복음화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한국 개신교 50년 동안 한국 교회를 이끌었던 이들은 바로 이들 장감의 복음주의 선교사들과 이들로부터 복음주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한 장감 한국인 지도자들이었다.
1907년 가을 선교사들은 한국인 남성과 여성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몇몇 남자 선교사들과 여자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견해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대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은 한국 남성과 여성의 복음화와 계몽(the evangelization and enlightenment of men and women)이었다. 한국 남자들에게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담스는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성령 충만을 꼽았다: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 민족이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참된 이해의 기초이며 출발이고 주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영향력 있는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벙커 역시 “한국인 사역자들이 매일의 삶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적인 지식으로 굶주린 그들의 백성들을 먹일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급선무”라고 말하였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모든 백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빛과 생명과 구주요 왕이신 그리스도이다”라는 무어의 견해도 거의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세 사람만이 그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견해는 당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있었던 여성들에게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심포지엄에서도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거의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구세군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말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power of God)”이야말로 현재 한국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에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일치하였다. 그만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놀라운 영적 각성과 세계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사회개혁과 놀라운 복음 전도가 이 민족을 살리는 이 시대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경회와 부흥회(revival services)야말로 어떤 다른 것보다 한국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수단이라고 확신했다. “한국의 사회 및 산업 상태는 지식이나 한국인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부패와 상류층에 의한 하류층의 압박 때문에 저 차원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요인들이 이 아름다운 나라 조선을 좌절과 쇠퇴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의 정치적 및 경제적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였고, 강대국, 특히 일본에 의해 착취를 당하는 상황에 그 길만이 한국을 살리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발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3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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