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일본에대해 비판적

외국 선교사들은 국내의 정치적인 소용돌이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한국 민족이 외국 열강들에 의해 직간접으로 찬탈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시급한 것이 이 민족이 복음화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압박 당하는 한국 민족들의 문제를 그저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몇몇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조국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의 반감을 산 것이다.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얼마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합방을 막기 위해 국제적으로 개입하거나 행동하도록 촉구하는 일에 앞장 섰다.

일본정부가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나치게 정치적인 선교사라는 비판을 받았던 알렌(Horace Allen) 선교사나 헐버트 선교사는 위기에 처한 황실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외국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매켄지(F. A. McKenzie)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통해 국내의 정치적 위기와 청일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영국인 베델은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국영문의 대한매일신보에 “이를 통렬히 반박하여 국민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통감부 설치의 부당성을 규탄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언론은 근대서양사상을 소개하고 민족을 계몽하여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이 민족이 대처해야 할 길을 제시하는 일에 앞장 섰다. 독립협회가 축이 되어 발간한 국영문 독립신문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외국인의 이권 할양에 반대하고, 민권 신장을 위해 투쟁하는 등 한국의 자주독립, 개화, 민권사상의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협회는 시사의 토론, 가두의 연설, 만민공동회 등 언론 집회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국으로 저변 확대시켰다. 1905년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을 전후로 한국이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으로부터 1,300만 원을 고리채로 차입하자 1907년에 여러 언론기관과 합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미국 선교사들이 발행하는 잡지 역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침략행위를 직간접으로 비판했다. 올링거(茂林吉, Franklin Oblinger, 1845-1919),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아펜젤러가 중심이 되어 1892년부터 격월간으로 간행된 코리아 리파지토리(The Korea Repository), 1906년부터 헐버트에 의해 격월간으로 간행된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는 한국민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실정을 외국에 소개하고 한국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가를 외국에 알리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언론들이 국민계몽운동을 펼치면서 일제의 국권찬탈에 직간접으로 저항하자 “1906년에는 일본 헌병대 사령관의 고시로써 한국인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사전보고제와 허가제를 실시하여 어떠한 집회나 결사라도 헌병의 감시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집회․결사의 모든 문서는 검열을 받아야 했고, 이를 위반할 경우 군율(軍律)로 처벌했다. 또한 친일단체인 황국협회를 통해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을사조약과 통감부 설치를 반대했던 대한매일신보 주필 베델을 영국으로 강제 출국시켰으며, 일본인 경영의 신문이나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를 통해 한국민을 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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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0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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