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전후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

교회의 놀라운 성장 이면에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1903년 미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으로 부임하여 관서지방의 교회와 교육기관에 헌신해 온 평양의 존 무어는 1908년 봄, 분주한 사역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몇 주간 동안 심하게 앓았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들은 사경회를 인도하느라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분주하게 전국을 누벼야 했고,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을 경험한 후 자신들의 사역지로 돌아가 그곳에서 능력으로 사역하면서 놀랍게 신장하는 사역의 현장을 돌아보며 복음 전도에 매진해야 했다. 주변 교회에서 그들을 초청해 집회를 인도하는 경우도 많아 그들은 자신의 교회를 돌보면서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이중 삼중의 고된 사역을 반복해야 했다.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은 1년 가운데 9개월을 사역의 현장에 전념하고, 누적된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다시 5월에는 평양에 올라와 신학공부에 전념해야 했다. 1908년 봄, “서울 장로교 교인이며 탁월한 한국인이었던 고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세상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수년 간 서울의 장로교회 사역에 있어서 탁월했던 인물이었다.”

성인들만 그렇게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자녀들이 사역 현장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된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원산부흥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04년 곽안련(클락) 선교사의 첫째 아이가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에 둘째 아이마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97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2년 11월 25일부터 평북 선천으로 이주하여 평북 선천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던 시릴 로스의 18개월 된 아이가 부흥운동의 물결이 한반도 전역에 몰아치고 있던 1908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막 재롱을 부릴 나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09 14:06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