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인구령운동의 확산


1910년 들어 백만인구령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백만인 구령운동 동안 한국을 방문 3월개간 전국을 다니며 백만인구령운동의 현장을 목도한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는 1910년 3월호 코리아 미션 필드에 직접 현장을 목도하고 느낀 “백만인구령운동의 진척”기사를 기고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백만인구령운동에 대한 가장 열렬한 관심을 발견했다. 선교사들은 이 운동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하고 인도하고 있었고, 반면 한국인들은 여러 날을 연보로 드리고, 무한한 열심과 열정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복음서를 구입했다.“금년 백만 명”의 외침은 번갯불처럼 한국 전역을 휩쓸었고, 한국인은 영혼 구령자로서 비교할 수 없는 열정을 증명해 주었으며, 수백 명이 천국 백성이 되었다.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 때 평양 장로회신학교 앞마당에서 개최된 미국의 저명한 부흥사 알렉산더의 전도 집회에 동원된 평양 시내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강연을 듣는 광경이다. 평양은 이미 1907년 대부흥운동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1910년 백만명 구령운동 때와 일제 시대 부흥과 전도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래서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3개월 동안 전국 주요 지방을 순회하며 백만인구령운동을 직접 목도한 데이비스는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놀라운 선교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직접 그의 말을 빌린다면“내가 느낀 기쁨을 말로는 기술할 수 없고 내가 받은 축복도 다 기술할 수 없다.”데이비스가 1910년 1월에 방문한 군산, 전주, 광주, 목포, 공주, 행주, 평양 지역 모두 백만인구령운동으로 불타올랐고, 첫 방문지 군산 지역부터 추수를 기다리는 하얀 벌판(the fields white for the harvest)이었다. 벌(W. F. Bull)이 맡고 있는 지역의 한 교회에서는 주일 아침 공간이 비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어디나 그와 같은 놀라운 성장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금요 심야기도회와 정기적으로 모이는 기도회였다. 1909년 이후 새벽기도가 정착되더니 이제는 금요 심야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주일을 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토요 집회도 열고 있었다. 토요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두 명씩 마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다음날 주일에 사람들을 초청했다. 길선주 목사는 교인들을 향해“여러분의 입을 열고 무엇이든지 말하기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실 것이다”고 외쳤고, 모든 교인들은 그대로 실천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그 기적의 현장을 매일 목도한 길선주 목사는 1910년 초 미국의 조지 매큔 선교사에게 감격에 겨워 이렇게 전했다:


나는 당신이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멘. 나는 그의 영광의 놀라운 현시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흐르는 눈물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 지금 이 시간에 대학생들과 중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있으며, 그리고 초등학교 학생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열정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7살 난 작은 아이들도 함께 모여 돈을 가지고 와 전도지와 복음서를 삽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거리로 가지고 나가 돌리며 전도합니다. 이 작은 어린 소년들이 불타는 열정으로 충만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이야기를 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개인에게 가서 그들의 팔로 그들을 붙잡고 그들에게 그들의 구주 예수를 영접하라고 간청합니다. 어제까지 약 400명이 교회에서 일어나 처음으로(3일 혹은 4일 동안에)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몇 사람은 이전에 이들 작은 어린 소년들이 그들에게 전도했을 때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다며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와 그의 은혜의 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백만인구령운동 전도집회에서 많은 이들이 결신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3주 동안의 집회에서 700명이 결신했고, 평양의 남산현감리교회에서는 한 주 만에 100명이 결신했다.“확실히 하나님의 영이 놀라운 방식으로 한국교회에 쏟아 부어지고 있었다.”북감리교 선교사 노블이 인도한 평양의 한 감리교 지도자 사경회에서는 한 명의 한국인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장로교 독노회가 이기풍선교사를 제주도에 파송한데 이어 감리교도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 복음화”를 위해 한국의 교회를 사용하시려는 위대한 선교의 시작일 뿐이었다. 1912년에 결성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3명의 한국인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한 것도 같은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복음의 빚진자의 사명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한 민족복음화의 열기는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도 불타고 있었다. 1910년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진관사로 알려진 서울 북부에 위치한 한 오래된 불교 사찰에서 제 1회 YMCA 학생 사경회가 열렸다. 언더우드, 이상재, 김규식, 길선주, 에비슨, 왓슨 등 지도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그곳에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었다. 한일합방이 체결되던 1910년 제 1회 YMCA 학생 사경회가 서울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인 진관사에서 열린 것은 일제의 침략 앞에 종교적 결속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장차 염불 소리 대신 기도와 찬양의 소리가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지게 하시려는 깊으신 섭리였다.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 대신 간절한 기도소리가 산속의 정적을 깨고 고요한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스님들은 학생들을 위해 자신들의 방 대부분을 양보해야 했고, 반면 외국인 강사들과 대표자들은 이교 신들로 둘러싸인 사찰 안에 야영(野營) 간이(簡易) 침대를 펴고 모기장을 매달았다. 성령의 임재를 위한 수많은 간절한 기도 소리가 부처의 발밑에서부터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고 있었다. 집회는 때로는 사찰의 막사로 사용하고 있는 한 커다란 한국인 방에서 갖기도 하고 때로는 불상 앞에 있는 대형나무 그늘에서 갖기도 했다. 혹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리며 염불을 외는 늙은 노승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후 그들의 불상 앞에서 심벌 소리가 울리고 드럼 소리가 울려나는 가운데, 전통적인 기독교 찬양을 부르고,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고, 학생들 가운데 주님의 사역을 논의하는 이 열렬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 어제의 한국과 오늘의 한국 사이의 대비가 매우 생생하였고, 한국의 장래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왔다.


한일합방을 통해 민족의 주권이 상실당한 이때 전국의 10개 학교 학생들이 모임을 가진 것이다. 미션 스쿨에서 인정받는 탁월한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 만들겠다는 깊은 뜻이 내재되어 있었다.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신음하며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위기를 신앙으로 극복하려는 결연한 의지,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야 말로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첩경이라는 확신이 이들 모두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비록 10개의 학교를 대표하는 46명의 학생들만이 참여한 집회였지만, 제 1회 학생 사경회의 영적 분위기는 너무도 진지했다. 전국의 여섯 교단과 영국인,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포함한 4개국 16명의 강사진이 참여한 것은 이 대회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기에 충분하다. 참석자들 가운데 몇 명의 학생들은 무려 300마일을 달려왔다.


제 1회 학생사경회 일정은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성경공부와 특강이 길렛, 부록맨, 게일과 언더우드 강의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각종 운동경기로 팀웍을 다졌으며 저녁 시간은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결단의 시간이었다. 오전에는 아침 6시 기상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YMCA 총무 길렛(P. L. Gillett)의 요한복음 강해,  YMCA 부록맨(F. M. Brockman)의“신입생을 위한 사역”과“학생 성경공부,”한국의 스피어(Robert Speer)와 모트(John Mott)라고 불리는 게일과 언더우드의 강의가 이어졌다. 오후에는 전체 학생들이 모여 실내 축구, 야구, 검도 등 다양한 운동경기를 펼치며 서로의 유대를 다졌다.


그리고 저녁에는 민족과 교회를 위해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뛰어난 언변가 김규식의 폐부를 찌르는 강의, 제물포의 와이어(H. H. Wire), 개성의 왓슨(A. W. Wasson), 그리고 서울의 게일(J. S. Gale)의 의학, 교사, 그리고 목회에 대한 소명 역시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시의적절한 강의였다. 저녁 집회는 전국에서 선발된 이들 젊은이들에게 민족과 교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고취시키는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불타고 있던 이상재의 강의 역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거룩한 불을 지펴주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접목시켜야 한다는 그의 평소의 철학이 강의에 그대로 녹아났다. 때문에 그의 강의는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게 충분했다. 더구나 나이를 잊고 작렬하는 그 여름의 매서운 햇빛 속에서도 학생들과 어울려 야구를 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브록맨이 이상재를 가리켜 고백한대로“한국인 신사, 아직 어린아이 같은 겸손의 사람! 학생들 사이에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제 1회 학생사경회는 백만인구령운동 기간 동안 일어난 수많은 집회 가운데 하나였다. 1910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국 어느 곳에서나 백만인 구령을 위한 전도집회가 개최되었다. 1903년 원산 기도회를 통해 원산부흥운동의 불씨를 지핀 맥컬리(Louise H. Mc-Cully)의 말대로,“‘백만인을 예수에게로’는 1910년 한국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표어였다.”이처럼 남감리교 선교사 몇 명이 시작한 백만인구령운동은 같은 선교회 소속 동료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협력, 그리고 더 나아가 외국교계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943년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발간된 한국북장로교선교사(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CUSA 1884-1934)는 백만인구령운동을 이렇게 기술한다:


100만 인 구령운동은 전국 교회와 선교회에 의해 활발히 추진되었다. 특별한 부흥운동 찬양 팸플릿이 발간되었다. 그 찬양 가운데 하나가 로버트 학니스(Robert Harkness)가 작사한 “100만인을 예수에게로”이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한 차례 혹은 그 이상의 전도집회가 개최되었고, 연례 사경회(the annual Bible classes)에는 전년 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소위 “날연보”(days preaching)에 더 많은 이들이 서명했고, 전도지와 권별 복음서가 대량으로 판매되었다. “날연보”에 서명했던 이들은 자비로 자신들이 서명한 날 수만큼 가가호호를 방문하거나 각 마을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그 일을 수행하는 동안 전도지와 성경 각권을 가지고 다녔다.  


1907년의 부흥운동과 마찬가지로 백만인구령운동도 성경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예를 들어 대구지역 연례 남자 사경회에서는 500명의 참석자들이 16,000권의 낱권 성경을 구입했고, 평양에서는 800명이 26,000권을, 그리고 선천에서는 1,100명이 35,000권이나 구입했다. 복음에 대한 빚진 자의 심령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로잡을 때 말씀을 더 사모하게 되고, 말씀에 대한 연구는 자연히 구령에 대한 열정을 더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복음을 들고 갔던 것이다. 19세기 말 미국 부흥운동이 사경회운동과 더불어 저변 확대되었던 것처럼 한국의 부흥운동도 사경회운동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 사경회에서 전보다 더 많은 성경이 팔렸다는 것은 말씀을 읽고 배우려는 열정이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백만인구령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총 100,000일을 전도했고, 수백만의 전도지와 70만 권의 낱권 복음서를 분배했으며, 한국의 거의 모든 마을을 방문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10일간의 전도집회 동안에 700명이 결신했고, 숭실중학교 출판부에서 발행한 73,000장의 전도지가 분배되었다. 전도지를 이와 같이 분배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기독교서회의 전신,“대한성교서회”(Korea Religious Track Society)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다. 대한성교서회가 1910년 1월부터 12월까지 출판한 것은 전도지 210,000개, 34,000권의 서적, 백만인구령운동 전도지 3,180,000장이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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