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인구령운동의 평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백만인구령운동은 원산부흥운동이나 평양대부흥운동과 달리 처음부터 목표 지향적인 전도운동이었다. 처음 이 운동은 이 나라에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다시 일어나야 하겠다는 몇몇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의 간절한 염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했던 개성의 몇몇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했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는 길선주 목사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가 또다시 임하기를 사모하면서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 백만인구령운동이 출발할 때는 이처럼 순수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시 그 수치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모색되면서 그 성격은 처음 의도와는 달라졌다.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 일차적으로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이 간과되고 인간의 책임이 크게 부상했다. 그 결과 백만인구령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사모하기보다 힘을 결집, 이것을 하나의 운동으로 추진하려는 인간적인 계획이 앞서고 말았다.


이것은 과거 1905년 신년 부흥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할 때나 1906년 8월 평양선교사 사경회와 그 후 선교사들이 한국인 지도자들과 연합으로 가졌던 정오기도회 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장감 선교회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동원해 백만인구령운동을 전국적인 캠페인으로 추진하려고 한 것이다. 백만인구령운동은 이미 복음을 먼저 받은 이들을 민족복음화운동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부흥운동이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비록 백만 명이 전도되지 못했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 전 개신교가 일치단결해 추진했던 일은 한국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족복음화라는 한 가지 비전을 그들이 공유하였고, 그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백만인구령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이 보여 주었던 이와 같은 민족복음화를 이룩하려는 한국인들의 구령의 열정은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현장에서 사역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구령의 열정과 실천을 통해 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고, 대규모의 전도운동을 통해 복음의 빛이 널리 퍼져 나갔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돌이켜 볼 때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실제로 100만 명의 영혼이 주님께로 인도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유사 이래 우리가 만난 가장 혹독한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민족의 에너지를 한데 묶어내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교회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 민족복음화라는 거대한 한 가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이처럼 힘을 결집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령인구령운동 동안 비록 평양대부흥운동처럼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한반도 전역을 몰아치거나 통회와 자복이 교회마다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비로소 한국교회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보았고, 정치적 독립의 좌절 속에서 새롭게 움터오는 민족의 희망을 보았다.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듯 기독교 신앙이 민족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곳에는 참된 애국주의가 발로되고 민족적 책임의식들이 태동되었다. 이점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암울한 민족의 정치적 현실 앞에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좌절할 수 있었지만 평양대부흥운동에 이어 진행된 백만인구령운동이라는 민족복음화 운동이 다시 한 번 영적인 차원에서 민족의 희망을 꽃피우는 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기독교는 민족의 희망이다’는 말이 당시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이 민족의 정치적, 민족적 위기 가운데서도 민족적 응집력 창출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 냈던 것이다.


아무도 백만 명의 새 신자가 백만인구령운동 기간 동안에 생겨났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몇 사람은 그 슬로건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수년 내에 새로운 회심자들이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백만인구령운동이 놀랍게 유익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의 심령에 찾아든 어둠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함으로써 퇴치되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교회의 엄청난 힘이 대단히, 그리고 영속적으로 증가되었다.

 

확실히 백만인구령운동은 기울어 가는 국운 앞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통해 흩어진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지위와 연령, 교파와 교단,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전국의 기독교인들을 하나의 결집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었다. 한국교회는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강요에 흔들리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거족적 집단으로 발 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백만인구령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1911년 제 5회 장로교 독노회는 1912년을 기해 총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고, 그 해 가을에 열린 장감 연합공회(General Council) 총회도 1912년에 장감 6개 선교회와 각 성서공회, 그리고 성공회(British Evangelistic Mission)가 참여하는 연합공회(Federal Council)로 확대 개편할 것을 결정했다.


그 동안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국적인 규모의 총회와 연회 조직을 통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했고, 양 교파를 대변하는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도 신학교로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한국선교의 후발주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와 그동안 별다른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던 동아기독교가 놀라운 성장을 이룩 장차 주류 교단을 향한 틀을 갖춘 것도 평양대부흥운동과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전국적으로 발화되면서 만주와 소련과 일본과 하와이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노력들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일어났다. 이처럼 백만인구령운동과 그 앞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복음화라는 거대한 비전과 꿈을 한국인들에게 깊숙이 심어 주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7 14:05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