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02월 23일/병인교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하던 그해(1866년) 2월 23일부터 병인교난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에 이어 4번째 받은 천주교의 대박해였다.

병인교난이 시작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원인은 천주교 세력의 엄청난 증가였다. 제 4대 주교 베르누(Berneux)가 1855년 4명의 서양신부를 대동하고 입국한 후 교세가 급증해, 1865년 고종 2년에는 12명의 서양 신부, 2만 3천 명의 신자로 늘어났다. 둘째 원인은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력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려는 "조영불" 삼각동맹 결성 계획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미온적인 태도였다.  마지막으로는 이웃 청국에서 시작된 서학에 대한 대탄압과 수많은 서양인들의 처형 소식이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2월 23일 베르누 주교가 체포된 후 곧 브레뜨니에르, 보오류, 도리, 쁘띠니콜라, 그리고 뿌르띠에 신부가 잇따라 체포되었고, 남종삼이 친족들의 치죄주장으로 고향에서 잡혔다. 체포된 한국의 천주교도들과 서양신부들은 개종하면 살려주겠다는 대원군의 제의를 거절하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2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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