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으로 옥중에서 신앙이 더욱 단련

105인 사건이 말해 주듯 일본의 기독교 박해는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으며, 이것은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계속해서 성장하던 한국교회는 1911년과 1912년 사이 상당수의 교인이 교회를 떠났다. 장로교의 경우 1911년 144,261명이던 전체 교인이 1912년에는 127,228명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한 해 동안 거의 17,000여 명이나 줄어든 셈이다. 세례교인은 1911년 46,934명에서 1912년에는 53,008명으로 늘어났으나 학습교인의 경우 35,508명에서 26,400명으로, 예배당 수는 1,448개에서 1,438개로, 그리고 학교 수는 656개에서 566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교세의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105인 사건으로 초신자나 학습교인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세례교인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투옥된 이들은 옥중에서도 조금도 신앙의 동요가 없었다. 1913년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保衛廉, 1873-1918)가 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옥중에 있는 동안에 선행을 해왔으며, 하루에 세 차례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졌으며, 한 사람은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신약을 15차례나 읽었다.” 교회를 해체시키려는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일제의 박해는 오히려 신앙의 공동체에 결집력을 더해 주었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105인 사건은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더 큰 우정과 동정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민족적 결속력을 더욱 견고히 했다.

한국교회사 역사상 가장 큰 전도운동 가운데 하나가 105인 사건이 종식될 즈음에 열렸다는 것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105인 사건으로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총독부는 1915년 9월 11일부터 50일 동안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기간 중 교회가 관람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각 교파는 연합전도대를 조직하는 한편 2,500원의 경비를 들여 목조로 대형 전도관을 건축해 전도활동을 추진했다. 이 기간 동안 전도지 40만 장을 배포하였고, 한국인과 일본인 포함 10만여 명이 전도회에 참석해 그 중 11,627명이 결신했다. 백만인구령운동 기간 동안과 비교할 때 이와 같은 결실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연합전도운동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장감이 주도했던 백만인구령운동과 달리 이번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 전체가 하나 되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0일 동안 진행된 전도집회는 북감리교가 13일, 장로교와 남감리교가 각각 12일씩, 구세군과 대한기독교가 각각 5일씩, 그리고 동양선교회가 4일씩 분담하여 주관했다. 과장된 표현인지 몰라도 이와 같은 협력은 한국교회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인 것 같다.
초대교회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박해 기간에는 교회가 신앙을 다지는 기회로, 그리고 그것이 완화된 후에는 교회가 외형적인 성장을 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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