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의 한국인들 방화범으로 대량학살됨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인 살해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일본 변호사협회마저 이렇게 개탄했겠는가:

조선인을 살해하는 모양을 말로나 글로나 표현할 수 없다. 쇠갈고리, 철사, 권총, 죽창, 일본도 등의 무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지금도 몸서리를 치면서 말하는 바이다. 더군다나 살해된 후에 시체를 불에 태우는 일에 이르러서는 당국 관헌이 인정한 일이면서도 이 사실을 발표하지 않는 것은 심히 비겁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죽은 한인들의 수는 경시청 조사를 따른다 해도 6,94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알려졌다. 한국인들은 동경 대지진의 방화자요 사회 폭동자라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이유로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던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폭군(暴君)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무참하게 살해했던 유사한 사건이 일본에서 발생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이상협 편집국장은 일본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하고 국내에 돌아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이렇게 개탄했다:

일본인은 표면상으로는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입을 열면 문화를 말하고 이른바 내선융화를 선전하지만 속마음으로는 한국인을 극도로 모욕하고 항상 한국인을 증오하며 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일본의 잔인한 박해는 실로 비인도적이어서 입으로는 감언이설로 사탕발림을 하면서 뱃속에는 독침을 품고 있는 것이며, 일본인은 참으로 무서운 친근할 수 없는 민족이다.

신문을 통해 반일, 배일 감정이 확산되자 9월 1일부터 11월 11일까지 총독부는 18회 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두 신문을 차압하고 그 외 조선에서 발행하는 31종의 신문에 대해서도 차압처분을 내렸다.
동경 대지진과 한국인 대학살 소식은 곧 해외에 알려지게 되었고,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학살사건을 각종 신문과 언론기관에 알려 보도하게 하는 한편, 이 사건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일본정부에 다음과 같은 강력한 항의서를 보냈다:

대한민국 5년 9월 10일
대한민국 외무대신 조소앙(趙素昻)
대일본제국 외무대신 야마모도 곤베에(山本權兵衛) 각하
숙계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조선사람이라면 보는 대로 곧 잡아서 죽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조선사람이라고 하면 보는 대로 짐승처럼 살육을 했다. 9월 1일 이후 7일까지의 사이에 조선사람을 큰 길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죽인 것이 하루에 5천 명에 이르고, 병영에 갇힌 자가 벌써 5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처럼 이재민을 까닭 없이 학살하는 것과 같은 일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만행 중의 만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여러 항목에 대하여 조사 해명 처리함으로서 우리 정부의 항의에 회답할 것을 요구한다.
1. 불법으로 강제 수용한 1만 5천 명의 한인을 곧 석방할 것
2. 모든 재화를 입은 지역 안에 한인 생사자의 성명, 연령, 주소에 대하여 상세하게 조사하여 이를 공포할 것
3. 한인을 학살한 폭도는 관민의 구별이 없이 엄중히 징계할 것

한국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관동 대지진 때의 한국인 학살사건은 약소 민족에 대한 압박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크리스챤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고 놀랍게도, 그리고 또 이상하게도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의 태도조차도 그러했다. “동경에서 죄 없는 선량한 한국인들이 학살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한국에서는 누구 한 사람도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함태영을 비롯해 김영훈(金永勳)과 박용의(朴容義) 세 명이 위문사절로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형식적 예의에 불과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2.09 07:47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