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 조항의 민족자결주의

1913년에는 의료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개업하는 것이 어렵도록 법규를 개정하고, 1915년에는 모든 종교를 정권의 통제 하에 두도록 신규 법규를 제정하고, 학교 교과과정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모든 종교활동에 대해 정부의 재가를 받도록 요구했다. 일제는 표면상으로는 종교 보호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광수의 말대로 “종교계를 억압하며 인민의 사상과 신앙과 자유를 속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일본정부는 교회를 새로 세우는 것도, 교회가 사례를 지불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도 허락을 받도록 강요했고, 새로 세워지는 선교회나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종교적인 예식을 수행할 수 없도록 했다.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반일적인 설교를 했다며 자주 소환되었다. 1915년 3월 총독부는 5년 이내에 모든 교사들에게 일본어 학습을 의무화시키고 “일본어”만으로 가르치도록 정했다. 이처럼 일제가 각종 규제령을 발표해 국내 산업, 농업, 종교 활동을 금지하자 지식인, 농민, 종교인 할 것 없이 반일감정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헌병경찰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 항일운동은 지금까지의 무력투쟁에서 비밀결사운동으로 전환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요원의 불길처럼 끊임없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수탈과 압박을 체험한 국민들은 독립의 의지를 결연히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일련의 국제정세는 항일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동력으로 결집시켜 준 것이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이었다. 1915년 1월 만주 몽고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에 맞서 일어난 중국의 5․4운동, 1917년 3월 제정러시아가 무너진 후 11월에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권,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위드로우 윌슨이 제창한 14개 조항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에게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은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자극과 고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김철, 김규식 등이 모여 조국의 광복을 협의한 끝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열국에 호소하게 하고,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한국 유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게 하고, 여운형을 소련으로 보내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후원을 청하도록 했다. 또한 김철을 국내에 잠입시켜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한편 연해주에서는 이동휘가, 미국에서는 안창호, 이승만 등이 각기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윌슨의 선언에는 식민지 문제 등 주권에 관한 사항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 폴란드 민족의 독립을 승인하려는 취지, 대소 국가의 정치상의 독립 및 영토 보전의 확보를 위해 국제연맹을 조직하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듬해 1919년 1월, 윌슨 대통령은 각 국 강화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그가 주창한 바를 적극 실현코자 했다.

-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2.2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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