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의 교회성장

평양에서만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양에서 발흥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서울과 다른 모든 지역의 교회들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을 계속했다. 서울 상동교회의 경우, 1907년 1월 초에 열린 부흥 집회 동안에만도 200명의 초신자가 등록했으며, 새로 등록하는 교인이 없는 주가 거의 없었다. 1907년 6월 북감리교 보고에 의하면 제물포의 북감리교회는 적어도 4명 이상의 초신자가 등록하지 않는 주일은 한 주도 없었으며, 한 주에 20명 이상 초신자들이 등록한 주일도 있었다. 그 교회를 감독하고 있는 한 선교사는 “우리 교회는 매주일 아침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으며, 특별한 경우 밀려오는 군중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제임스 게일은 1907년 9월 8일자 미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심각한 서울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늘 우리 교회는 500명의 새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약 1,200명이 모여 주일 오전예배를 드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부흥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07년 4월 초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담당하고 있는 강화 지역의 한 교회에서는 주일날 900명이 주일학교에 참석했고 주일예배에는 1,200명 이상이 출석했으며, 그날 120명의 남녀 성인과 어린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1907년 북감리교 보고서에 따르면 “강화의 우리 선교 사역은 대단히 번성하고 있으며”, “강화에 새 교회 건축이 시급하게 요구될” 정도로 시설이 외형적인 성장을 따라가지 못했다. 전통적인 한옥 스타일로 새로 지은 교회 건물이 모자라 주일예배를 위해 주변 건물을 잠시 빌려 사용할 정도였다. 지역에서 한 주간 가졌던 지역 사경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부흥 집회를 가졌다. 예정된 1주일이 지나자 한 주간 더 집회를 가져 달라는 요청을 가까스로 달래며 존스와 스크랜톤은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가는 교회마다 발견하는 뜨거운 복음의 열정, 마치 마를 대로 마른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가물어 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리듯 복음에 대한 흡인력은 대단했다. 교회마다, 예배 처소마다 일손을 멈추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 가운데 드리는 예배 광경은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존스가 방문한 4월은 시골이 농사 준비로 한창 분주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복음에 굶주렸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스위러가 지적한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이 있기 전에 한국 교회에 뿌리내린 “2천 개의 복음주의 교회들”과 이 나라에 생겨난 “십만 명”의 독실한 신앙인들의 숫자는 부흥운동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급신장하게 되었다.
-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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