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기독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시위운동의 중심 세력이라고 지목을 받았던 기독교인들과 교회였다. 33명의 3․1운동 서명자 과반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로도 교회에 대한 박해는 예고된 것이었다. 강서사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위원교회 학살사건, 서울 십자가 사형사건, 북간도 노루바위교회 및 서간도 각지교회 학살사건, 정주오산학교 피소사건,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전형적인 예이다. 이 중에서도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일제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기독교회를 탄압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1919년 4월 15일 2시경, 아리타 토시오(有田俊夫) 일본군 중위와 일단의 일본군은 35명의 제암리 교인들을 교회에 한데 모으고 문을 잠근 후 집중사격을 가해 모두 살해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일제의 제암리교회 만행은 단순히 한 교회에 대한 학살 차원을 넘어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결집시킨 교회에 대한 보복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은 전국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로버츠(Stacy L. Roberts) 선교사는 청주에서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총살당하거나 구타로 숨졌다고 보고했다. 첫 3개월 동안 무려 5만 명 이상이 일경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부상당했다. 3․1운동 직후 출간된 한국에 대한 진실(The Truth About Korea)에서 켄데일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의 일제 만행은 상상을 초월하여 진행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한 영국인이 지적한 것처럼, “성경에 침잠(沈潛)된 백성이 학정(虐政)을 접하자 백성이 멸절되든지 아니면 학정이 그치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발생했다.”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 신앙이 민족운동의 형태로 발로된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3․1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상당수가 개신교인이었다는 사실, 33인의 서명자 중에 거의 태반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비폭력운동(the nonviolent demonstration)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들이 3․1운동 시위 도중 부상당한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다 그들 역시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한때 비정치화를 표방하면서 정치적인 개입을 의도적으로 삼가던 선교사들마저도 일제의 만행과 핍박당하는 교회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선교사들 가운데 심경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이 문제에 깊이 개입하여 그 운동의 태동을 가능케 하는 세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한때 그들이 가졌던, 일본의 한국통치가 한국민의 장래에 유리하다는 시각을 바꿔 일본의 한국통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이다. 사무엘 마펫(Samuel Hugh Moffett)이 말한 것처럼 일제의 무자비한 폭정과 잔인한 만행을 목도한 선교사들은 “잔인한 만행 앞에 중립은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며, 측면에서 억압받는 한국인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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