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03월 17일/채필근 목사 소천


1973년 3월 17일 한국 교회의 산증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채필근 목사가 소천했다. 그는 일생동안 자기만의 노선을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박형룡 박사가 정통주의 입장을, 김재준이 진보주의 입장을 천명했다면 채필근은 정통주의와 진보주의의 양극단을 배격하고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1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채필근이 평양신학교의 정통주의에서 온건한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였다. 1920년 캐나다 선교회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한 채필근은 메이치학원 고등학부 문과(1923년 졸)와 동경제국대학 문과(1925년 졸)에 유학하면서 신학영역을 넘어 폭넓은 세상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일반, 철학, 역사, 심리학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저술도 남겼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통과 진보가 공존하고 있었다. 평양신학교 출신이면서도 조선신학원 설립운동에 관여하였고, 1943년 장로교 총회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자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김재준, 송창근 등이 <신학지남>에 진보적인 글을 발표하고 <아빙돈 단권주석> 번역에 참여하는 등 전통적인 신학이 위협을 받을 때에는 그는 교단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진보적인 노선에 있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했다.

교회가 단순히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도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교회가 상황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 교회 본질 자체를 퇴색시켰다는 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2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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