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의 성령의 역사


대구에서도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부흥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강하게 일고 있는 가운데 1907년 대구 겨울 사경회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조사, 권서인, 집사, 주일학교 교사들을 비롯해 약 3, 4백 명이 등록한 가운데 2월에 10일간의 사경회가 시작되었다. 강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그 역사적 현장을 처음부터 목도했던 재령 주재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헌트였다. 그를 통해 집회 기간 어느 날 아침, 모인 이들 가운데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날이 1907년 3월 3일 맥팔랜드(E. F. McFarland)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주일 아침에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전한 날이었다.


3월 3일자 편지에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죄의 실체를 깊이 깨닫기 시작했으며, 그 사경회는 그가 지금까지 주관했던 사경회 가운데 가장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사경회였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브루엔(W. M. Bruen)도 1907년 4월호 코리아 미션 필드에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나는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결코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나는 내 옆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상당한 몸부림 후 그는 일어서서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는 2년 전 성경학교에서 얼마의 돈을 훔쳤다고 고백했다. 그 후 한 사람씩 일어나 더듬거리면서 띄엄띄엄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마치 얼음을 깨듯이 이날부터 유사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죄의 고백에 이어 돌려주는 사례들이 여러 번 일어났다.


내용은 다르지만 죄에 대한 고백은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주인 몰래 음식비 일부를 착복했던 맥팔랜드의 요리사의 고백이었다. 이 요리사는 시장에서 계란을 구입하고는 실제 구입한 액수가 1냥인데 1냥 10전이라고 맥팔랜드 선교사에게 부풀려 청구했던 것이다.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그 숨겨진 죄를 성령께서 그대로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 현장에 있었던 브루엔의 증언대로 그날 밤 성령이 그에게 임하자 자신이 지은 죄가 큰 죄라는 것을 깨닫고 맥팔랜드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착복한 금액을 배로 갚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회개 가운데 임한 것이다. 이 같은 회개는 공개적으로 하기보다는 브루엔이 관찰한 대로 본인을 찾아가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숨겨진 죄악들을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 때 성령의 임하자 길선주가 자신의 죄악을 먼저 회개하고 그의 얼굴이 거룩함으로 불탔던 것처럼 대구 사경회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 앞에 자신들의 죄성을 발견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령을 통한 변혁, 곧 심성의 근본적인 변화, 옛 생활의 청산,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는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곳마다 성령께서 사경회에 참석한 자들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셨던 것이다. 브루엔(Bruen)의 고백대로 은혜를 받은  대구 사경회에 참석한 자들은“깨끗한 양심과 깨끗한 원장(ledger, 原帳)”을 가지고 새 출발하려는 마음으로 벅차올랐던 것이다.

 

장대현교회 사경회처럼 대구 사경회 역시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양장대현교회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듣고 간절히 사모하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심지어 인위적인 노력도 기울였지만 실제로 그 같은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인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기로 결정한 후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신 것이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는 대구사경회와 관련하여 “지난 겨울 남자 사경회가 개최되었을 때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명백하게 우리와 함께 계셨다” 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자 겨울 사경회가 10일 동안 개최되었고 거의 500명이 등록했다. ……우리는 재령의 헌트로부터 매우 대단한 도움과 유익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죄를 알고 고백하고 성결의 능력으로 임하신 성령을 받았다. ……사경회 마지막 3일 전까지는 성령의 현시가 없었다. 그 후 갑자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사 성령이 임재하였고, 사람들이 놀랍게 기도 가운데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었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성령께서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실 것을 간구했다. 이어 다른 선교부의 대부흥운동에서 목도되었던 그와 같은 장면들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료들과 바른 관계를 정립했다. 사경회가 끝난 후 대구 시내 교회가 약 10일 동안 집회를 계속했는데 대단한 유익과 성령의 축복이 있었다. 그것은 전 지역에 걸쳐 우리 사역을 영적으로 놀랍게 고취시켜 주었다.


사경회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 영적대각성은 대구의 중심교회들로, 다시 대구 시내 전역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대구의 교회들은 은혜로운 성령의 역사, 거룩함의 회복, 복음의 영적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대구 지역의 교회가 전국에서 주목 받는 교회로 성장한 것도 바로 부흥운동을 통해서였다. 개인의 영적각성이 개인의 거룩함의 회복과 삶의 변혁으로, 개인의 영적변혁이 교회와 사회의 영적변혁과 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는 대구지역의 선교와 관련하여 이렇게 집약했다.“선교사들과 한국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대단한 영적 축복이 임했던 한 해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대구 지역의 교세가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구의 교세는 1907년에 놀라운 성장을 이룩해 1906년에 비해서도 세례교인이 235명에서 564명으로 140%가, 학습교인은 1,318명에서 2,796명으로 112%가, 그리고 등록교인은 3,876명에서 6,371명으로 64%가 성장했다. 대구 지역의 이 같은 성장은 과거 평양에서 나타난 급성장과 견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그 기적의 현장을 목도한 북장로교 선교사 어드만(W. C. Eerdman)은 1907년 5월 24일 미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여기 선교사역의 대단한 진보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가장 경이적인 역사 장면(the scene of the most marvelous working of God)이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말씀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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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1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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