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04월 15일/제암리 학살 비고

 
1919년 4월 15일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운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제암리의 정확한 주소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로 수원에서 남서쪽으로 20km에 위치해 있다. 이 제암리 학살은 일제가 얼마나 무참하게 한국의 교회와 교인들을 박해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제암리교회는 1905년 아펜젤러로부터 복음을 접한 안종후가 가정집에서 예배를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3.1.운동이 발생하자 제암리교회의 안종후, 안종린, 홍원식, 강태성, 안진순 등은 이웃 고수리의 천도교인 김성렬과 모의하여 제암리에서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안종후를 비롯 제암리교회 청년들은 삼일운동과 발맞추어 3월 15일부터 밤마다 뒷산에 올라가 봉화불을 올리며 만세 시위를 벌이는 한편 인근 발안 장터에까지 나가 만세 시위를 하였다. 제암리교회에서 시위 도중 안종후가 완전무장한 일경의 총에 맞아 쓰러지자 격분한 군중들이 일경 1명을 타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일제는 4월 15일 일본군 1개 중대 30명을 제암리에 급파시켜 마을을 포위하고 남자들을 강제적으로 예배당에 몰아넣고는 무차별하게 사격을 가했다. 일본 헌병들은 창문과 벽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남편 죽음 앞에 통곡하는 한 여인의 머리를 칼로 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어린애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칼로 어린 아이마저 찔러 죽이고는 예배당에 석유를 붓고 시체들을 모두 불살랐다. 제암리 마을 전체에도 불을 질러 모두 폐허로 만들었다. 30여 채의 작은 마을에 이 사건으로 살해된 사람들만 29명이 넘었고, 그 만행은 이웃 마을에서도 자행되었다.

만일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미국 영사 커티스, 수원지방 감리사 노블, 미국 기독교 협의회가 일제의 비도덕적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지 않았다면 제 2의 제암리사건이 계속 되었을 것이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4.2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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