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04월 27일/의주 청년 33인의 세례

 

초기 한국선교가 선교사들 보다는 한국인에 의해 주도 되었음을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가 1889년 4월 27일 의주에서 33명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이다.

1885년 제물포에 입항한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9년 4월 릴리아스와 결혼하고 신혼여행 대신 선교여행을 하던 중 평안북도 북서부 국경에 위치한 인구 12만의 의주에 도착했다. 의주는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 짓는 국경의 통로로 일찍이 이곳 젊은이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백홍준, 서상륜 등이 만주 우장에서 활동하던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와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생성된 곳이었다. 때문에 복음이 일찍이 싹이 트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의주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명의 신자가 세례를 요청해와 그 중 33명에게 압록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렇게 집단으로 세례를 청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언더우드 자신도 의아해할 정도였으나 사실은 이 모두가 존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서 번역에 참여하고 그 성서를 가지고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와 성서를 뿌린 의주 청년들의 선교의 결과였다.

곧 의주는 선천에 개설된 북장로회 선교부의 관할 하에 장로교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이곳에서 장로교는 의료, 문화, 사회사업, 신문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였고, 1918년에는 15개의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0년에는 김창식 등의 발기로 의주기독교청년회(YMCA)가 조직되어 기독교 청년사회운동, 지역사회개발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사실 "의주군읍교회가 진흥하다"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사기의 기록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4.2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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