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기간동안 의료 사역도 활발

한국 선교 사역에서 처음부터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의료 사역은 부흥운동 기간 동안에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기성의 평양, 선천, 대구와 부산에서의 의료 선교는 물론 각 지방의 의료 선교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군산의 다니엘(T. H. Daniel), 목포의 폴시더(W. H. Forsythe), 해주의 노톤(Arthur H. Norton), 그리고 공주의 제임스 밴 브스커크(James Van Buskirk)는 이 기간 동안 의료 선교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이들이었다. 개성에 “아이비 메모리얼”(Ivy Memorial) 병원이 1907년에 건립되었고, 서울 동대문에 “감리교 여자 병원”이 1908년에 건립되었다. 1907년 겨울에는 한국 의료 선교회(the Korea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결성되어 의료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
1908년 3월 28일 금요일에 한국 의료 선교회 서울지부가 연례모임으로 스크랜톤의 사무실에서 모였으며, 이 모임에서는 한국의 복음화와 교육에 있어서 의료 기관의 유효성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의료 사역이 단순히 의료 봉사 차원이 아니라 의료 선교의 분명한 목적이 이 나라의 복음화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비슨의 책임하에 운영되어 온 세브란스 의전이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한국의 의료 분야에 대한 신기원이자 또한 한국 부흥운동의 결실이 아닐 수 없었다. 부흥운동을 통해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 현장에서 의료 분야에 대한 더 많은 요구가 있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07년 두 명의 한국인 간호사가 배출되었고, 1908년 7월 세브란스 의전이 첫 일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이다. 1908년 7월 코리아 미션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표지에 아비슨 교장과 함께 찍은 이들 일곱 명의 졸업생 사진이 게재된 것만 보아도 한국의 선교 사역에서 의료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졸업식에 참석한 총독 이토 히로부미마저 세브란스의 첫 졸업식이야말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스크랜톤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 선교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인 갑신정변을 계기로 광혜원이 설립되었고 이것이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며, 한국 선교의 발전을 위한 산실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제 그것이 다시 오늘날의 세브란스 의전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어 오늘의 결실을 이룰 수 있었다. 세브란스 의전이 배출한 일곱 명의 졸업생은 국내의 모자라는 의료진을 공급한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부흥운동 기간 동안에 그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의료 분야에 있어서도 한국인에 의한 의료 선교를 향한 도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부흥운동 기간 동안 상당한 의료 선교 활동의 발전이 있었다. 그 한 예가 1908년 5월 20일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료 시설이 부족했던 평양에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의 재정 지원으로 설립된 “평양 여성병원”(Women’s Hospital)이다. 이와 같은 활발한 의료 선교의 움직임은 서울에서도 있었다. 여성과 소아들을 위한 두 개의 병원이 서울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들 병원 역시 매우 광범위하고 유용한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어나는 의료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동대문에 여성과 소아들을 위한 새로운 병원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완벽하게 추진되어 1908년 봄에 개원되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4.2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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