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번져 나간 성령의 불길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곧 압록강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까지 넘어갔다. 제일스 게일이 언급한 것처럼“만주 지역에서도 한반도에서 일고 있는 대부흥운동 소식을 들었고,”1907년 장대현교회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친히 목도하기 위해 2명의 중국 교회 지도자가 만주에서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직접 목도한 이들은 만주로 돌아가 평양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그대로 전해주었고, 평양의 소식에 큰 도전과 자극을 받은 만주교회는 간절히 은혜를 사모했다.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가 전하는 것처럼 평양과 한반도 전역에 임하신 성령께서 그곳에서도 그대로 임하셨던 것이다:


此가 各地에 傳播됨에 中國人 神學士 胡萬成, 張賜禎 等이 來하야 一週間 留하얏난대 言語가 不通되고 通譯도 업섯스나 禮拜하난 儀表만 보고 聖神의 恩賜를 밧앗스며 其國에 歸하야 自己의 敎會를 復興케 하얏나니라. 同年 春에 中國 牧師 劉全岳 等 二人이 平壤에 來하야 當地敎會 職員들과 牧丹峰에셔 祈禱할새 自己 敎會를 爲하야 懇切히 哀痛하며 祈禱하엿나니라.

 

이렇게 해서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 만주로 확산되어 그곳에서도 강력한 회개와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라토렛의 지적대로 만주에서의 “놀라운 종교적 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평양이 한국의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된 것처럼 만주는 중국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만주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특별히 중국 내지 선교회의 여러 지부나 선교회 협력 단체들로 확대되어 소위 대중 부흥운동으로 여겨지는 놀라운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위에서 언급한 이들 외에도 평양 부흥운동의 목격자는 더 있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1907년 평양으로 내려온 중국 주재 고포드(J. L. Goforth) 선교사가 그 것이다. 한국의 8개 주요 선교지를 방문하며 대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대각성운동의 목격자가 된 고포드는 돌아가 중국 목단(牧丹)의 교우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었고 이 소식을 전해 받은 중국교인들은 큰 도전을 받고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초대를 받은 지쿵산(Chi Kung Shan) 교회에도 평양대부흥운동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주일 저녁 그 소식을 들려주었는데도 예배를 마칠 때까지 반응이 없다 축도를 마치고 약 6분간 적막이 흐른 뒤 갑자기 회중들 가운데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간절히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바람에 그날 집회는 보통보다 늦게 끝났다. 이 같은 일은 전에는 없었던 강력한 성령의 임재였다. 고포드가 증언한대로 그곳에서의 사경회와 기도회는 그 후 4일간 계속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게 현시되었다. “그것은 선교사들 가운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놀라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중국 교회에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가을 우리는 중국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현시된 것을 보기 시작했으나 만주와 그 밖의 지역에서 1908년에 접어든 이후에야 성령의 역사는 놀랍게 증가했다.”옥스퍼드대학 출신 브라운(J. Macmillian Brown)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만주의 부흥운동과 그후 중국 전역으로 저변확대된 부흥운동은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과 분명히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


만주 부흥운동은 두 장로가 그 나라에 종교가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한국에서 돌아온 후 랴오양(Liaoyang)에서 시작되었다. 그들과 또한 한국을 막 방문한 호난 출신 캐나다 선교사 고포드가 랴오양에 있는 교회에 한국에서의 부흥운동을 설명했다. 그리고 곧 유사한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은 목단(牧丹)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목단(牧丹)에서는 혹독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두 차례씩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포장되지 않은 목단(牧丹)의 진흙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 만큼 목단의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다. 마치 영하 20도를 오르내릴 만큼 무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1907년 1월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북전역에서 평양 장대현교회로 모여들었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참석한 이들 모두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 앞에 무릎을 끓고 통회했다:


강한 남성들이 흐느끼더니 부복하고는 울부짖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옛 삶의 죄악들을 적나라하게 고백했다. 모든 사람들은 복음 전도를 진작시키는 일에 너그러운 연보를 드리는 일과 그들이 잘못 행한 이들에게 그 값을 보상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경쟁적이었다. 그들은 토지, 집, 자신들의 수입 혹은 봉급의 십일조 혹은 그 이상을 드렸다.


철저한 회개, 옛 생활의 청산이라는 면에서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오순절을 경험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강도들과 연루된 한 남자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오랫동안 마룻바닥에서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목단(牧丹)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목단 북서부 70마일 떨어진 파쿠만(Fakumen), 하일런챙으로 이어져 여기서도 똑같은 기도, 고백, 울부짖는 탄식이 나타났다. 사경회에 참석한 두 사람이 자기가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했고, “전 회중이 고꾸라져 큰소리로 자비를 부르짖었다.”성령께서 죄로 어두워진 중국 민족을 찾아가신 것이다. 게일이 자문한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중국인들 내면에 깊이 감추어진“영혼의 비밀들을 드러낼 수 있으며”, “누가 이 더럽고 고약한 인종으로 하여금 그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들겠는가?” 게일의 말대로 그 현장에는 장로교의 예배 모범도 감리교 교리문답도 없었고, 그것이 부흥운동의 요인으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했을 뿐인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모든 부흥운동”은“지속적인 기도”후에 나타났으며,“시간과 장소의 필요”에 의존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였다.


불신자인 브라운마저 “그와 같은 각성운동은 중국에서는 전례가 없고 눈에 띄는 것이다”고 증언했다. 부흥운동이 점점 진행되면서“온갖 형태의 부흥운동에 대해 강하게 신경질적인 편견”을 가지고 그토록 부흥운동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판하던 뉴촹(New-chwang)의 필립스(Phillips) 박사도 부흥운동으로 인한 죄 사함과 통회의 사건을 단순한 히스테리로 치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말씀사,2007)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1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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