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중국 입국과 한국선교 준비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Rhyader, Radnoshire)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B.A.)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4년 후 목사안수를 받은 후 중국에 왔다. 1863년 6월 4일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토마스는 윌리암 케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그 해 7월 21일 폴메이스(Polmaise) 호를 타고 중국을 향했다. 토마스가 아내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한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었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 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와의 사별이라고 말한 한 현대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은 토마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써내려 갈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그가 아내의 사별로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대변해주기에 충분하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그에게 아내의 죽음은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곳 기후가 자기의 아내한테 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구(漢口)의 기후가 어떤지 살펴보러 갔다가 아내의 비보를 들은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 이국 만리타향에서 비보를 접한 23세의 젊은이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가지고 이국 만리를 달려왔던 젊은이의 가슴은 견딜 수 없어 터질 것만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중국에 와 있던 현지의 런던 선교회 총무 무어헤드(Wm. Muirhead)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자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에 가서 청국의 해상세관에서 통역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암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암슨이 전해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의 소속 선교사로 서해안으로 떠났다.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1-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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