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현 칼럼]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인간의 눈이 하나뿐이라면 균형감각과 거리감각 상실로 날마다 여기저기서 부딪히고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외눈박이로 위치감각을 상실한 채 현실과 가상, 사실과 허위,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곳에는 '나'라는 대문자가 활개치고 다니기 때문에 '너'라는 소문자는 감히 돌아다닐 엄두를 내지 못하며, '배려'나 '이해'와 같은 상생의 단어들은 아예 사라진 지 오래다. 이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다. 여기에 빠지면 살아난다 해도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기 때문에 이 바람이 불면 권력도, 지성도, 재물도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유구무언이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지난 한 주 우리 사회는 실체 없는 광우병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두려움과 공포의 패닉을 경험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이처럼 순식간에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을 떨게 했던 이 희한한 사건의 밑바닥을 뜯어보면 정부의 미숙함을 빌미로 확산된 균형잡히지 않은 정보를 자양분으로 하는 죽음의 공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거리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학생이나 시민은 머잖아 제자리로 돌아가 있을 것이요,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TV 화면은 또 다른 이벤트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 죽음의 공포가 또 다른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이 사회는 또다시 패닉에 빠질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 얼굴을 보였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회개하기 전의 바울이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주모자로서 살기가 등등하여 천지사방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그의 얼굴에서 이것을 본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조금의 주저함도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 숨통까지 조이는 것이 여기에 사로잡힌 자의 특성이다.

죄의 후손인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 살기 등등한 사울의 얼굴에서 어두움의 비늘을 벗겨냈던 것은 예수님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바울은 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생명의 땅으로 건져내는 자가 되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이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는 바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살기 등등한 모습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죽음의 공포에 짓눌린 사회를 건져내는 것은 살인자였던 사울을 생명의 사도로 거듭나게 하였던 성령의 능력에 붙들린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이토록 죽음의 공포에 흔들리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옷입지 못한 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크다. 믿는 이들이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예수님의 사랑을 젖어들게 할수록 우리 사회는 돌멩이 하나에도 소리내는 얕은 개울에서 그 어떤 돌덩이들도 품어내는 깊은 강이 될 것이다.

거짓과 허위의 난리와 소문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사회를 장악할 때 그 힘을 잃을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믿는 자부터 성령으로 옷입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 사회를 진동시킴으로 음란과 술수와 거짓으로 신음하는 이 민족의 심장을 관통한다면 5월은 더 이상 갈등과 소모의 달이 아니라 사랑을 생명을 덧입는 축복이 달이 될 것이다.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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