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 이웃이 당하는 고통


지난해부터 세계 곡물 가격이 치솟아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빈국들이 식량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들의 먹거리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최고위층이 실토할 만큼 심각한 식량 위기가 도래했다. 여기에다 혹독한 군사독재로 신음하는 미얀마에는 일찍이 유례 없었던 사이클론이 닥쳐 13만여명의 인명 희생이 있었다. 세계가 이렇게 신음하고 있는 중에 이번에는 중국의 쓰촨성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 10만여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고 하니 자연이 가져다준 시련이 너무나 혹독하게 지구촌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웃의 참혹한 시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어찌되어야 옳은 것일까? 수일 전 중국의 일부 언론에 이번 일에 대한 한국 네티즌들의 댓글이 소개되어 지진으로 상처 입은 그들에게 큰 분노심을 야기시킨 일이 있었다. 주된 내용은 '그동안 중국이 아시아를 괴롭히고 역사를 왜곡한 것에 대한 자연의 징계다'라는 반응이다. 물론 깊은 사려 없는 일부 네티즌의 표현이지만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폭력성 언급들이 아닐 수 없다. 이웃이 고통당할 때는 우선 아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다.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이웃이 해야 할 범주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 비난과 욕설을 일삼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촌 이웃에 대한 근본 도리를 벗어난 졸렬하고 비겁한 행동이다. 오히려 우리는 위로와 도움의 길을 찾고 회복과 치유를 위해 도움을 제안하는 등 성숙하고 인간미 넘치는 행동을 보여야 옳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런 대재앙의 사건들 속에서 겸허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중하고 진지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번 지진으로 7000여 학교 건물이 붕괴되어 수많은 어린 학생이 희생되었다면 이는 필시 부실 건축이 그 원인일 것이며 그 배후에는 관료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가 원죄적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도덕성이 무너진 곳에 파괴적 재앙이 뒤따르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우리 모습을 성찰하는 진지함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암담하다. 누가복음 13장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학살 사건에 대하여 예수께 말씀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건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바르게 가다듬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능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살피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인간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알량한 기술과 지식을 이용해 마구 파괴하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한 정직한 자기 점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앞서서 지금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고통에 던져진 지구촌의 이웃을 위해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그 아픔에 참여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지성이요 윤리이며 신앙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in necessar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in unnecessaris libertas),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in omnes charitas)'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말을 깊이 음미해보면 오늘의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손달익 서문교회 목사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2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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