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대한 선교열에 불타던 토마스의 입국

1865년 9월 13일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1865년] 9월 4일 중국의 목선을 타고 지푸를 떠나 13일에 한국의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 해안에서 우리는 2개월 반 동안 보냈습니다. 나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인에게 전하기에 넉넉한 그 지방 언어를 한국인 천주교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토마스가 다시 북경에 돌아온 후, 1866년 1월 12일자 자기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곳 한인들은 목이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토마스가 주는 성경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조선이 천주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당국으로부터 선교의 윤허를 받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당시에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만주 해안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오랜 표류 끝에 이듬해 1월 초에 우장(牛莊)과 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간신히 돌아갔다.
잠시 북경대학 학장 서리로 일하며 한국선교를 물색하던 토마스는 1866년 1월 한국에서 동지사(冬至使) 일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그들이 묵고 있는 예부회동관(禮部會同館)까지 찾아가 한국 사절단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오문환의 토마스목사전에 따르면 토마스와 개화파의 거장 박규수(朴珪壽)와의 만남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되어있다:

박규수를 비롯한 동지사 일행과의 만남은 너무도 짧고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토마스는 한국선교에 대한 전의를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더구나 평양감사 박규수와의 만남은 토마스의 평양행을 더욱 사모하게 만들어주었다. 1866년 4월 4일자 편지에서 토마스는 북경에 온 동지사 일행 중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의 포켓에 한문으로 된 쪽지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거기에는 “어느 외국인이 서해안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마태복음 책 하나를 구득(購得)해 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여기 어느 외국인은 토마스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다면 토마스는 서해안에서 불과 얼마 전에 전했던 자신의 선교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 된 것이다.

제너널 셔먼 호와 토마스의 입국
이렇게 조선에 대한 선교열에 불타던 토마스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병인박해로 여러 명의 불란서 신부와 수천 명의 한국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자 불란서는 한국 정부에 대한 보복을 강행하기 위해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을 통해 불란서 함대를 출동시켜 한국 정부를 응징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토마스는 로즈 제독으로부터 안내자 겸 통역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승낙했다. 불란서 해군 제독 로즈는 병인박해로 살아남아 중국으로 피신했던 세 명의 불란서 신부 가운데 한 사람인 리델(Ridel) 신부로부터 한국의 박해와 불란서 신부의 처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한국 정부를 문책하기 위해 떠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인도차이나 폭동이 발생해 그곳으로 함대가 출동하는 바람에 한국행이 취소되고 말았다. 이것은 토마스에게는 섭섭한 일이었지만, 후대 한국개신교 선교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이었다. 만약 일이 순조로웠다면 과거 정치 문제에 개입했던 불란서 선교사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격이 되어 그로 인해 조선 정부에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심겨졌을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침 기회를 찾던 중 미국인 프레스톤의 소유인 상선, “순양함”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조선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1866년 7월 “한국에서 반포하기 위해 몇 권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통역 겸 안내자로 승선했다. 셔먼 호의 입국은 일반적으로 통상으로 알려졌으나 그리피스는 중국인들 사이에 평양에 있는 한 조선왕의 무덤의 관이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셔먼호의 입국이 이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가 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실제로 계획되었었는지, 또 이 사실을 토마스가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한국선교를 계획하고 있던 토마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확신만이 들었을 것이다. 선교의 경험이 없고, 아내와의 사별로 인해 정신적인 안정과 여유도 없었지만, 그의 젊은 가슴은 선교열로 불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앞날에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 조선 선교여행을 통해 선교의 결실을 거둠으로써 그는 그동안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던 런던 선교회 본부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는 그가 순교하기 전 조선을 향해 떠나면서 런던 선교회에 보낸 1866년 8월 1일 지푸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 짙게 담겨져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라 희망에 부풉니다…[런던 선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아무 인간의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시인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이처럼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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