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선교사들이 왜 이땅에 묻혔는지 느껴져”

양화진 기독문화휴식공간으로 탈바꿈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화강석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루비.R.켄드릭. 미국 캔사스 여자 성경학원을 졸업한 뒤 독신으로 한국에 파송된 미 남감리회 여성 선교사. 개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교활동을 하던 중 한국에 온지 8개월만인 1908년 6월 급성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 여덟의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이땅으로 오게 했을까. 그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사랑했던 것은 무엇일까. 143명의 선교사들이 안장돼 있는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묘원. 언덕에서 바라본 한강의 흐름은 평온했다.

고요함도 잠시,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특별활동을 나왔다는 중학생부터 과제 준비를 위해 온 대학생 등 90여명의 학생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안내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뭔가를 메모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는 헐버트 선교사,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부인, 백정들을 위해 차별없는 복음을 전했던 무어 선교사의 묘비 앞에서 학생들은 금세 숙연해졌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H B 헐버트)

교양 필수과목인 '기독교와 세계' 수업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위해 왔다는 5명의 이화여대 국제학부 1학년 학생들은 "고향 땅에 묻히지 않고 왜 굳이 한국 땅에 묻히려고 했는지…"라며 고난의 땅에 와서 목숨을 다하기를 소원했던 외국 선교사들을 추념했다.

헨리 아펜젤러의 맏딸로 25년 동안 이화여대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한다(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고 적혀 있었다.

김윤아 학생은 "아버지 아펜젤러가 한국을 위해 헌신했는데 딸 아펜젤러까지 이화학당 교장을 맡아 한국 여성의 권리와 사상 개혁을 위해 일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홍지원 학생은 "도심 속에 자연과 어울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학습을 하고, 나들이하기에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묘원이 어느덧 문화공간이자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오래 방치돼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이곳은 2001년부터 공원화됐다. 묘원내 선교기념관 사용권을 둘러싸고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와 주한 외국인들이 주축을 이룬 서울 유니온교회가 한때 갈등을 겪기도 했다. 초기 한국 기독교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묻힌 공간이 성장한 한국 기독교계의 다툼이 되는 것이 또한 현실인 것이다.

묘원 관리를 맡고 있는 100주년기념교회 교육관 1층. 영상을 보면서 양화진의 역사와 주요 선교사를 소개하는 시청각 안내 시간은 즐거운 수업 같은 분위기였다. 언더우드 목사의 24세 때 사진이 영상으로 비춰지자 여학생들은 "잘 생겼다"며 좋아했다. 언더우드 목사가 부인 홀트 여사보다 8세 적었다는 설명에 "와, 연하남"이라며 깔깔 웃었다.

학생들은 묘원에 묻혀 있는 자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느끼는 것이 많다고 밝혔다. 김서연 학생은 "이화여대가 미션 스쿨이지만 기독교인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면서 "하지만 이곳에 와 보니 기독교 정신이 무엇인지,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왜 죽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신종수 기자 jsshin@kmib.co.kr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30 08:09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