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06월 20일/이기풍 목사 별세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제 1회 졸업생이며, 장로교 첫 해외 선교사(제주도)이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이기풍 목사가 1942년 6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본래 이기풍 목사는 1890년 평양 서문통 사거리에서 노방전도하는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저 큰 상처를 입히는 등 기독교를 핍박하는 싸움과 술주정꾼이었다.

신자를 박해하던 그가 전도인 전군보에게 전도 받고 1894년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매서인, 조사를 거쳐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동료들이 평양이나 서울에서 큰 교회를 담임하면서 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에 반해, 이기풍 목사는 복음이 닿지 않은 오지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일생을 헌신했던 그늘에 가리워진 지도자였다.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한 그는 갖은 편견과 핍박, 열악한 환경과 굶주림의 장벽을 극복하고 성내,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재, 두모, 용수, 고산, 모슬포, 중문, 법환, 성읍, 세화, 조천 등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잠시 전남 순천교회를 담임하다 1927년에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성내 교회를 담임하며 제주도의 복음화를 위해 매진했고, 1934년에는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수군 남면 우학리의 작은 섬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였고, 끝내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대항하다 순교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6.20 16:17
  • 수정 2020.12.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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