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젠도르프

  모라비안 공동체의 영적각성

1727년 진젠돌프가 이끄는 헤른후트(Hernhut)의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주목할만한 부흥운동이 발흥했다. 진젠돌프(Nikolaus Ludwig Reichsgraf von Zinzendorf, 1700-1760)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캐톨릭의 반종교개혁운동(Counter- Reformation) 세력에 의해 흩어진 모라비아의 신앙인들, 후스를 따르는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단들이 자신의 영토인 오버라우지츠 땅에 있는 베르텔스도르프에 거주하도록 허락했다. 진젠돌프는 공직까지 사임하고 헤른후트 이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한 교회사가가 지적한 대로“진젠돌프는 이후부터 임종시까지 단지 형제단교회를 위해 살았던 것이다.” 이들 형제단은 역사 속에“모라비안 형제단”혹은“모라비안 공동체”로 널리 알려졌다.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성경은 중요한 지침이었다. 여기서는 말씀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성경적인 민주적 정치제도가 부활되었으며, 공동의 경건을 위한 찬송과 축제의 시간도 허용되었다. 진젠돌프의 경건주의 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근대 부흥운동의 효시로 평가받을 수 있다.


첫째는 1727년 이후 헤른후트 형제단이 보여준 철저한 경건의 실천과 훈련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경건주의 공동체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졌다면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구주가 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중요시하였다. 미국의 나이아가라 사경회가 보여주듯이 재림의 신앙은 신자들을 깊은 잠에서 깨우는 영적각성의 원동력이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주님과의 살아 있는 인격적 교제는 우리의  신앙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준다. 모라비안들은 삶의 전 영역 속에서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생명처럼 여기고 실천했다. 


이들은 성별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체 일원을“대”로 나누고 다시 작은 공동체인“단”과“반”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공동체의 경건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들의 경건훈련은 종교시, 경건문학, 새로운 예배형식 그리고 새로운 목회상담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며 저녁집회를 갖고 성경요절 암송과 삶의 반성을 통해 경건훈련을 실천에 옮겼다.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와 묵상에다 그 말씀대로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매일 이를 점검하는 훈련을 가졌다.

 

둘째는 해외 선교운동이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근대해외선교의 모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일에서 일어난 헤른후트 공동체의 해외선교는 근대 자발적인 선교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진젠돌프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로 파송하고, 이듬해 크리스티안 다비드(Christian David)를 파송하는 한편, 독일 남부와 동 서,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 러시아, 북미와 서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 선교지를 직접 다니면서 해외선교를 독려했다.

모라비안 교회

모라비안 공동체의 해외선교는 부흥운동과 깊은 연관을 지니며 발전했다.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자 전도와 선교에 대한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흩어진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생명을 바치는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경건주의운동이 해외 선교를 주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경건주의운동으로 태동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18세기 1세기 동안 6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반면 모라비안 공동체는 그 4배에 육박하는 226명을 파송하여 근대선교를 주도했다.


참된 부흥운동, 영적각성운동은 국내외 선교를 가속화시켰다. 부흥운동을 통해 영적각성을 체험하자 그 안에 복음의 빚진자라는 자의식, 구령의 열정이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 이후 인디안 선교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2차 대각성운동 이후 해외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19세기 무디 부흥운동이 학생자원운동을 태동 20세기 해외선교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부흥운동은 해외선교운동을 태동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셋째 사회개혁의 저변확대이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충만한 교회의 표징 거의 모두를 소유하였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개혁운동을 태동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경건주의운동은 이성과 자율의 시대로 대변되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차가운 오성에 의하여 풀이 죽은 많은 영혼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해주었다. 당시 불신앙을 대변하는 레씽, 괴테, 헤이더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도 진젠돌프의 경건성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진젠돌프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영적경건의 역사적 기원은 경건주의운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필립 슈펜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50)였다. 특히 슈펜너의 피아 데시데리아는 모라비안은 물론 전 경건주의운동의 영적 동력이 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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