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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과 일본에서의 복음의 준비
2008년 08월 14일 (목) 08:03:28 평양대부흥

 

 이수정과 일본에서의 복음의 준비

   
 
 
만주 우장에 거점을 마련한 존 로스 선교사와 의주 출신 젊은이들에 의해 중국에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廷)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학자 이병규(李秉逵)의 아들 이수정은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친우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開化說)을 주장하였으며 여러 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로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2년 임오군란 후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일환으로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로 한 수신사(修信使)를 파송할 때 김옥균과 민영익을 국왕의 밀사 자격으로 수신사와 동행시켰는데, 이수정은 이 두 사람의 수행원 3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민비의 생명을 구해준 공로를 인정받은 데다 “왕과 가까운 친우로 왕의 근친”이었고 민영익과도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어렵지 않게 진행될 수 있었다. 본래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오래전부터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민영익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1881년 초 이전에 이미 부산주재 일본영사 콘도우(近藤)와 접촉하고 “동경(東京)에 가기 위하여 일본 주우은행(日本住友銀行)에 적금(貯金)”도 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상당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한때 민영익과 함께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국의 길을 찾는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1년 농학부문 담당,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우(知友) 안종수(安宗洙)를 통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전수받고 한국에 그것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안종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농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 전해 들었고, 쯔다센에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산상수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처럼 고상한 정취를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매우 놀랍고, 그러한 가르침은 확실히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국인(內國人)들에게 금교(禁敎)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산상수훈을 담은 두루마리를 본국으로 가지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내가 배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쯔다센의 탁월한 선진 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돌아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으로 국민들에게 농업 선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수정의 일본 방문과 회심


이수정이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는 일본의 문화,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 및 조운(漕運) 시설 사찰(査察)이었으나 제일 큰 관심은 일본의 농업정책이었다. 1882년 9월 19일 사절단 일행과 함께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고베(神戶)를 거쳐 10일 후인 9월 29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틀 후 28일에 동경에 도착한 이수정이 “짐을 풀 사이도 없이” 제일 먼저 농학자 쯔다센(律田仙, 1837-?) 박사를 접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쯔다센과 개신교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 미국 선교사들과도 교분을 갖기 시작했다. 쯔다센은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주었고 교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쯔다센은 당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주고, 한문을 인용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감동을 받고 쯔다센이 갖고 있던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즈음 그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그는 그가 배운 것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성실하게 말씀 연구에 전념했다. 이 즈음 그는 한 꿈을 꾸었다. 꿈에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두 사람이 한 바구니 가득 책을 가지고 와 이수정이 ‘이것들이 무슨 책이냐’고 묻자 그들은 ‘이 책들은 당신 나라의 모든 책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책들이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수정이 무슨 책이냐고 묻자 그들은 ‘그것은 성경이다’고 답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던 당시의 이수정은 이 꿈이 예사의 꿈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자기에게 주신 일종의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이상한 꿈을 꾼 이후 이수정은 성경연구에 더욱 몰입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성경의 진리의 빛에 의해 새로운 세계로 이끌려갔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귀국하고, 다시 얼마 후 박영효가 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쯔다센 박사 밑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 받겠다는 이유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그러나 그가 남은 진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로부터 농업기술을 전수 받는 중에 훌륭한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인격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쯔다센 박사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亨)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에 나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과 언론으로부터 “매우 멋진 의상에 대단히 솔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통했던 이수정은 쯔다센에게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받으며 신앙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 간지 9개월 만에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문답에 대한 그의 답변은 너무도 명확하고 또렷했다. 시취(試取)한 일본인 목사나 낙스 목사는 물론 방청했던 사람들 모두가 이수정의 분명한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어 답변실력에 놀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비록 일본에서 9개월 밖에 체류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두 번에 걸쳐 설교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정확한 언어로 모인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가 쓴 한문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그림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30일 본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는 대단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미 여기에 있는 그의 모든 한국인 동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들이 이미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자질(scholarship)과 능력과 더불어 그의 탁월성은 그의 한국인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쿄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은 ‘만약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불과 18년 전 이수정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과 그의 가까운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순교 당했다. 그의 팔과 다리가 먼저 절단되었고, 그 후 그의 머리가 절단되었다. 이수정은 몇 차례 밤에 나의 집에서 ‘만약 내가 나의 조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느 때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수정이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고, 문장 실력이 탁월했다는 것은 1883년 동경에서 천주교의 조선 전래 과정을 그린 천주교입조선사실(天主敎入朝鮮事實)이라는 이수정의 일종의 천주교소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바를 기억에 의존하여 기술한 책치고는 매우 섬세하고 논리적이고 심지어 역사 서술 방법에 있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구성 자체가 훌륭하다. 또한 그가 자신의 친구 손붕구(孫鵬九)의 뒤를 이어 명치 1883년 8월부터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 그 이듬해 여름에 출간한 한국어 교재,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의 뛰어난 구성과 내용전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은 조선의 지리, 민속, 제도, 법률, 정사, 도학, 문예, 물산, 기구 등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대화식으로 조선을 소개한 책이다.
미국 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5월 11일 이수정의 세례 소식을 본부에 알리면서 이수정이 그의 조국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당시 일본 사람들과 일본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 이수정이 복음을 접했다는 소식은 곧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 선교단체나 교회가 그를 연사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1월 일본에서는 선교사, 목사, 교역자,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일본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대부흥이 일어났고, 그와 같은 부흥의 열기는 가장 가까운 나라 조선에 대한 선교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와 같은 때에 이수정이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83년 5월 8일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우에무라(植村), 니이지마 죠(新島)를 비롯한 전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 3회 전국기독교도(全國基督敎徒) 대친목회(大親睦會)가 동경에서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대부흥집회였다. 집회 4일째인 5월 11일 오전 8시에 신에이교회당(新榮敎會堂)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 참석한 일본인 목사 오쿠노 마사즈나(奧野正綱)의 제청에 의하여 이수정이 등단하여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렸다. 비록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수정의 한국어 기도를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순절의 영감을 더해주었다고 우찌무라 간조는 술회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參席者 中에는 한 사람의 韓國人이 있었는데 그는 이 隱遁國의 國民을 代表하는 名門의 사람으로 一週日 前에 洗禮를 받고 자기 나라 衣服을 항상 着用하는 氣品이 堂堂한 者로서 우리 中에 參席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말로 祈禱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 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祈禱는 無限한 힘을 가진 祈禱였다. 그가 出席하고 있다는 事實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事實이 그 場所와 光景을 더 한층 五旬節과 같이 만들어주었다. 大親睦會는 復興을 完全한 펜타코스트(Pentecost)로 化하게 함에는 現實이 불같은 ‘혀’가 必要하지만(행 2:3) 우리는 그것을 우리들의 想像力으로 補充했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무엇인가 奇蹟的이요 놀랄만한 事實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온 會衆이 다 같이 感得했다. 우리들 會衆 一同은 다 太陽이 머리 위에 비치고 있지 않은가 하기까지 神奇하게 여겼다.

우찌무라 간조의 이와 같은 고백은 이수정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감동을 주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의 세례와 대친목회(大親睦會)에서의 유창한 기도, 해박한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뜨거운 동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모인 이들의 마음에 진한 감동을 남긴 것이다. 대중 앞에서의 담대한 신앙고백과 기도는 그가 신앙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6 (대 친목회)
1883년 5월 12일, 도쿄쿠단자카(東京九段坂) 스즈끼(鈴木)씨의 사진관에서 찍은 전국기독교 신도 대 친목회 간부 사진에는 이수정이 정 가운데에 쯔다센과 마주 앉아 있어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날 오후 이수정은 닛보리(日暮里), 아스카야마(飛鳥山), 수정원(修正院)에서 개최된 대친목 야유회에서 요한복음 14장에 근거하여 자신의 구원의 기쁨을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을 한문으로 써 내려갔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그의 신앙고백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세례를 받고도 그 사람 마음속에 참된 신앙이 없다고 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수정은 인간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자신의 분명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포기된다면 곧 기독교가 포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마음에 믿음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에 풀어야 할 문제라고 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진리를 통달하고 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이해한 것이다. “진리를 통달했건 못했건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지 그 큰 은혜를 나누어 받을 뿐”이라는 그의 고백에서도 이신칭의 신앙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 삼위일체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교통 등 그는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독교 진리에 대한 뚜렷한 식견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신앙의 지식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뜨겁고 감동적인 기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찍이 그의 숙부가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대원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이수정 역시 이미 일본에 건너오기 전에 어느 정도 기독교에 대한 기본 식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천주교와 기독교를 예리하게 비교하여 이 둘의 차이를 설파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전의 고민의 흔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국에서의 박해와 그로 인한 숙부의 처형은 그에게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더욱 촉구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될 때는 적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가운데 받아들였을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수정의 성품과 관심은 바뀌어갔다.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사모함과 동포에 대한 구령의 열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 중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성경공부반도 생겼다. 1883년 말 요한복음 15장에 기초한 그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이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수정의 활달한 성격, 분명한 신앙 고백과 민족에 대한 구령의 열정, 그리고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즈음 일본교회의 잡지, 七一雜報나 六合雜誌에는 이수정에 대한 소개가 계속 나타나 그의 인기가 상당했음을 말해준다. 이수정에게 세례를 준 조지 낙스(George William Knox) 선교사와 조지 낙스와 절친한 사이였던 미국 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도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수정은 “자신의 백성에게 성경을 줄 수 있기를 대단히 갈망”하고 있던 차에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 선교사가 한글 성경 번역을 의뢰하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미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가 한국을 위해서도 성서반포사업을 추진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루미스로부터 성경 번역을 의뢰 받은 후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 성경 번역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이수정은 로개쥬쵸교회 야스카와 목사의 도움으로 “시간적으로 방해를 받지 않은 조용한” 그의 서재에서 성경 번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경 번역 과정중 이수정은 동경대학 한국어 교수로 있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29일 이수정에게 “마태복음 원고와 상당한 양의 마가복음 번역이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미스가 야스카와 목사의 안내로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수정은 이미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역하였고, 로마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루미스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수정은 “나는 사도의 서간들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만족할 때까지 결코 글자 한자도 쓰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번역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했는가를 말해 준다. 이처럼 성경 번역에 대한 이수정의 애착은 남달랐다.
이수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것도 제공해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나는 자네가 지금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자네는 최근 매우 크게 변화하였으며 어떤 새롭고 특별한 기쁨을 찾은 것 같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수정은 그 친구에게 “나는 내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마음의 큰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답했다. 확실히 그는 어떤 다른 조건들이나 다른 이유로 성경 번역을 착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은 영혼의 평안이 그의 마음과 전인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의 확신과 민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앙이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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