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성경적 삶의  구현

이처럼 부흥운동이 한국인의 의식과 사고를 바꾸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영적 각성의 결과였다. 전통적인 유교 관습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성경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 한국인들에게 사경회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던 성경 말씀이 한국인들의 문화와 맞아떨어진 경우가 많아 말씀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영적 각성은 회심자들에게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 살도록 자연스럽게 촉구하였다. 경건주의운동이나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 그리고 영국의 웨슬리 부흥운동 등 모든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은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들 가운데 임했던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890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통해 말씀 연구를 가장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채택한 이후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말씀을 연구하여 말씀대로의 삶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한글 성경이었다. 한글 성경은 복음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 복음이 신분과 성과 나이를 넘어 한국인들에게 깊숙이 전파되게끔 하였다. 사경회마다 성경 연구는 중요한 부분이었고, 이 성경 연구는 단순히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대상이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실제로 자신들의 개교회와 지역 사경회에서 십분 활용하여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은 사경회 기간 동안 “문자적으로 성경대로 살았다.” 가장 나이 어린 어린이로부터 가장 나이 많은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필수품이었다. 그들은 곧 “모자나 신발 없이 교회에 올 수 없듯이 성경과 찬송가 없이는 교회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처음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부터 성경이 자신들의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 젊은이는 “그리스도가 나의 삶에 오시자” “영적 및 지적 변화가 나타났으며, 나의 지적 기관들이 각성되어 지식,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사경회에서 가르치는 핵심 내용은 성경이었다. 사경회는 성경을 그대로 배워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기도, 성경공부, 전도와 전도 집회로 구성된 사경회는 말씀대로의 삶을 실천에 옮기는 훈련의 기간이었고, 여기서 훈련받은 이들은 그 후에도 그대로 살았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신앙과 삶이 별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다행히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이 한국인들에게 낮설지 않아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 씨 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등 수많은 예화들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익은 이야기들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성경공부를 흥미 있게 만드는 한 가지는 성경에 가득한 동양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미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점들에서 매우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어느 날 밤 나는 한 한국인 집 마루에 앉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살짝 담겨진 콩기름에서 나는 빛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미국의 촛대와 초를 가지고 다녔다. 한번은 집주인이 거의 모든 농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말을 가지고 와 나는 초를 그 위에 두었다. 우리는 그날 변화산의 사건을 배우고 예수께서 산 밑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우리가 사역에 대한 영광을 그것을 베푸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말한 후 누군가에게 마태복음 5:14-16을 읽게 했다. 막 그들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읽을 때 나는 촛불을 말 아래 두자 집안이 캄캄해졌다. 나 자신을 포함해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 사건에 깊이 감동되어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너무 어두워 모든 빛을 말 위에 둬야겠군요. 빛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비추도록 해야겠어요.”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풍습들, 곧 유대인들의 풍습이 한국의 풍습과 매우 유사한 데가 많아 20세기 초 농경사회를 축으로 한 한국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8.1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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