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휘필드와 칼빈주의 부흥운동

 

글루스터 교회 - 조지 휘필드의 고향

부흥운동의 지도자 조지 휘필드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는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미국의 영적대각성운동의 발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렉키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영적대각성운동이 이 시대 이들 국가들을 구했고, 그 중심에는 조지 휘필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칼빈과 같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 높였기 때문이다. 존 칼빈은 자기는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또 사람이 아무리 많은 특권과 큰일을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을 행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조지 휘필드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교단을 만들지도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거나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 높였다.

  

휘필드의 위대함은 그가 미친 영적각성운동에 있었다. 그가 영적대각성운동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기 전 영국의 상황은 참으로 참혹했다. 당시 영국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영국국교는 술취함과 성적 타락이 대단했고, 장로교회는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빠졌으며, 비국교는 영적인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영국 국교를 지배한 신학은 알미니안주의였다. 당시 국교회의 흐름은 로드 카탐(Chatham) 경이 말한 대로 신조는 칼빈주의적이고 예배의식은 천주교적이고 성직제도는 알미니안주의였다. 알미니안주의적이면서도 영적으로는 잠들어 있었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고수한다고 하면서도 교리적으로 아리우스 주의가 집배하고 있었다. 교리적 순결성을 상실한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듯 이단사상에 물들어 있던 장로교는 사멸의 위기를 맞았고, 알미니안주의 영향이 강한 영국국교는 영적인 잠에 깊숙이 빠져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보일(Boyle)은 강좌를 개설하고 버틀러는 유추(Analogy)를 저술하여 기독교를 변호하고,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이 저술을 남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 것은 부흥운동이었다. 부흥운동이 발흥하면서 영적으로 침체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깨어났고, 도덕적인 수준이 놀랍게 향상되었으며, 노동의 신성함이 회복되었고, 일련의 사회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를 중심으로 한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영국사회를 변혁시킨 놀라운 원동력이었다. 이모든 것들은 조지 휘필드, 하웰 해리스, 다니엘 로렌스, 찰스 웨슬리와 요한 웨슬리 형제의 등장으로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실들이었다.


이 시대 감리교운동(Methodism)이 영국과 웨일즈에서 발흥했다. 감리교는 칼빈주의 감리교와 알미니안 감리교로 나눌 수 있다. 휘필드, 베리지(Berridge), 토플래디(Toplady), 로메인(Romaine), 로랜드 힐(Rowland Hill)과 리차드 힐 경(Sir Richard Hill), 헌팅톤 백작부인은 칼빈주의 감리교운동의 주역이었고, 웨슬리 형제와 존 플레쳐(John Fletcher), 토마스 올리버(Thomas Olivers)는 알미니안 감리교운동의 지도자였다.


휘필드, 하웰 해리스, 다니엘 로랜스에 의해 주도된 웨일즈 감리교는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웨슬리의 영국 감리교는 알미니안이었다.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 입장을 취한 것은 당시 영국 국교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알미니안주의인 데다 웨슬리의 아버지 어머니 모두 알미니안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웨슬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면 웨일즈의 로랜드, 해리스, 휘필드는 칼빈주의 영향을 반영하는 39개조 신앙고백과 청교도들의 신앙을 연구하면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웨슬리의 영국감리교가 뜨거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이들이 웨일즈 감리교도들이었다. 웨일즈 칼빈주의는 뜨거운 복음에 대한 열정과 찬송이 어울린 예배를 드렸다. 웨일즈인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쳤다. 구원의 감격과 은총을 감정과 느낌 속에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빈주의 열정의 전형을 보여준 웨일즈 교회가 연속적인 부흥을 경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리스와 휘필드가 대변하듯 감리교운동은 구원과 사죄의 체험에서 출발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었던 해리스와 휘필드에게 중생, 거듭남, 감정 그리고 느낌은 중요한 주제였다. 휘필드나 해리스 로랜드는 정통교리를 중시했지만 그 정통교리, 바른 믿음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구원의 감격과 충만을 경험하기를 원했다.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이들에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마치 1738년 5월 24일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체험했던 것처럼 마음이 뜨거워졌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둘은 1735년 성령 안에서 죄에 대한 각성, 구원의 확신, 사죄의 기쁨을 경험하였다. 이 후 이들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 그 이상의 내면적 충만과 확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칼빈주의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갖게 만들어준다.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참된 칼빈주의는 영적 충만을 사모한다. 참된 칼빈주의는 부흥과 성령의 역사,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강조한다. 칼빈주의가 강력해질수록 뚜렷한 영적각성을 경험한다. 그것은 부흥이 참된 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조지 휘필드의 설교 모습

칼빈주의는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강조한다.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지 못한 칼빈주의는 참된 칼빈주의가 아니다:


“성령의 찾아오심과 물러가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의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칼빈주의라 하는 것을 저는 반대합니다. ...“차갑고 서글프고 음울하고 침체된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라 칼빈주의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칼빈주의는 감정, 열정, 뜨거움, 찬양,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보여준 것처럼, 이사야 63장의 기도처럼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슬퍼하시며 우리를 떠나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통회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칼빈주의는 진정으로 자신과 민족의 죄악을 놓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가 다시 임하도록 간구해야 한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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