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 사회 개혁의 원동력으로서의

웨슬리 부흥운동 연구


A Study

on the Wesley Revival

as the Driving Force of Social Reform in the Eighteenth Century England



배 본 철



1. 서론


이제까지 18세기 웨슬리(John Wesley)의 부흥운동에 대한 역사는 지나치게 신학화(神學化)된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곤 했다. 그러나 역사 진행의 동인(動因)을 언제나 신학적인 범주에서만 찾고, 또 그 의미를 신학적인 데만 국한시키는 것은 자칫 편협한 시각의 역사관을 낳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 자체를 진솔히 대하기 위해서는 신학화된 장벽을 뛰어넘어 역사의 저변에 깔려 있는 여러 문화적, 사회적 요소들을 수집하여 새롭게 접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동기와 관심을 가지고, 특히 사회적인 면에서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비단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영국사회를 갱신하는데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 많은 면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새로운 이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브레디(J. Wesley Bready)는 이같은 웨슬리 부흥운동의 주된 본질은 도덕적 의와 내적인 자유를 향한 그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1) 웨슬리는 참된 신앙이란 “인간의 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선한 행실을 열매 맺는 인간 영혼 속의 하나님의 생명”2)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부흥운동과 함께 다양한 사회개혁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는 Foundery의 교회를 편물공장으로 만들어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Foundery, Bristol, West Street 등에 의료원을 설치하여 병자들을 돌보았다. 또한 교회에 빈민학교를 설립하여 무산(無産) 아동들의 교육을 맡았으며, 가정구조회를 설립하여 의류나 음식을 수집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근면한 빈민자들을 위하여 빈민은행을 설치하여 그들에게 저리(低利)로 대부해 주어 그들의 생업을 도와주었으며, 서점을 경영하여 이 서점의 이익금은 모두 구제와 전도를 위해 사용하였다. 이 이외에도 웨슬리는 교도소 방문을 정기적으로 하였으며, 노예제도 반대운동과 금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웨슬리는 Moravian학교 방문의 영향으로 New House라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Newcastle에는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운동의 지속적인 역사는 부정한 것을 방어하는 능력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 노동자운동(Labour movement)이 일어났을 시기에, 막스주의자들의 무신론과 관념적 합리주의자들의 기승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기독교의 영향력은 ‘맛을 지닌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런가 하면 역사성을 지닌 부흥운동의 저력은 교리지상주의자들과 정치적 투기꾼의 음모에서도 영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복음운동의 능력은 큰 사회적 개량의 원동력이 되었다.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적 조명에 대한 연구를 위해 본 소고는 먼저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사상적, 교회적 상황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운동이 필연적으로 치유해야만 했던 당시 사회의 일반적 문제점들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웨슬리의 사회개혁 행동과 그의 신학사상 사이의 상호의존적인 본질적 요인들과, 또 이를 위한 웨슬리의 사회활동의 몇몇 중요한 분야들을 가려내어 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같은 활동들의 근거가 되는 웨슬리신학의 사회적 적용의 원리들을 살펴보아 그 변함없는 역사적 가치를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갈등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적용하고자 한다.

2. 18세기 영국 부흥운동 이전의 일반적 문제점들   


  이신론의 영향

17세기말부터 18세기초에 퍼진 계몽주의 정신의 필연적인 결과는 종교에 대한 합리주의적 접근이었다. 그래서 18세기에는 성서의 비합리적인 내용의 신비를 벗겨내는 식의 분석은 특히 개신교 내의 자유주의적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주로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선전 활동에 있었다.3)

17세기에 캠브리지 대학의 성직자와 학자 그룹인 캠브리지 플라톤 학파는 각 종파(宗派)간의 교리 분쟁에서의 욕지거리와 위선적 태도에 불만의 뜻을 나타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비교적 단순하고 합리적인 몇 개의 교리로 줄일 것을 제안했다. 이성과 신앙은 상극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다. 즉 이성은 신앙에 통하는 길이며, 신앙은 이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1691년부터 1694년에 걸쳐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웅변가 John Tillotson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이성 자체가 거룩한 진리에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갖춘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성서를 읽을 때 이성을 활용할 것을 정력적으로 옹호했고, 실제적으로 성서의 교리보다는 자연 종교에 나타난 진리들(the truths of natural religion)과 윤리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John Locke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였다는 단 하나의 주장에까지 압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그 외의 것으로서 기독교도에게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쳐 온 것은 대부분 미신적이거나 권력에 굶주린 성직자들의 발명품이었다는 것이다.

Locke의 이같은 주장은 18세기를 통해 영국교회에 번져 나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인기는 종교에 대한 그의 합리주의적 신념에만 뿌리박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합리주의라는 것은 상류계급과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무엇이든 열광적인 것은 하층계급의 행위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교회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쪽의 편을 들게 된 것이다.

영국의 신학자 Thomas Woolston이 쓴 충격적인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한 논문들’(Discourses on the Miracles of Christ) 6편은 1727년부터 1729년에 걸쳐 출판되었다. 이것도 똑같은 노선을 따른 것이지만, 좀더 극단적인 어조를 띄고 있었다.4) Woolston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기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금껏 인류가 속은 가장 악명 높고 기괴한 사기였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영국교회는 자연히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였고, 교회의 강단은 이론적이고 배타적인 해석을 일삼는 논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또한 대학도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인 대화의 광장이 되었고, 교회의 교인은 많았으나 대부분은 명목상의 교인으로서 교회 출석만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교회의 부패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부패를 가져왔다.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 실업자들은 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전통적인 순결과 정절의 미덕을 냉소했으며, 원양무역으로 값싸게 제조된 술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이처럼 영국이 타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그 당시의 종교에 있었으니, 즉 그들의 신앙은 이신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질식상태에 있었던 것이다.4)


정치적 상황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청교도 청권이 무너지고 난 후의 영국 왕권은 비록 1660년 찰스(Chales) 2세의 왕정복구(王政復舊)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견고한 기반을 갖지 못했다. 1688년에는 캐톨릭 세력인 제임스(James) 2세를 국외로 추방시키고 입헌군주제에 의한 명예혁명을 성립시켰다.5) 이를 통해 영국은 <권리장전>을 소유하게 되고, 이 내용 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영국 국왕은 영국교회에 속한다는 점, 의회의 권리가 한층 강화되었다는 점, 과도한 세금 및 형벌에 대한 수정 등을 들 수 있다. 종교에 관해서는, 물론 1689년에 ‘관용법’(Toleration Act)이 제정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국교회 이외의 신자들에게는 정치권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임스 1세 국왕의 증손인 조지(George) 1세가 1714년에 왕위에 앉게 되자, 그는 영국 최초의 내각을 구성하고 초대 수상으로 월폴(Robert Walpole)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부패를 정치의 기본적 철학으로 삼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관료들, 교회의 감독들, 심지어는 국왕까지도 그의 부패의 사슬에 종노릇하게 되었다.5) 이처럼 18세기 초의 영국 정치의 현주소는 온갖 부정과 부패로 인해 극도로 타락해 있었다.


침체된 교회의 신앙

중세와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경험론과 회의주의를 토대로 발전되어 나간 계몽주의는 이성과 자연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사조 속에서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학문을 연구한 결과로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에 그치거나 혹은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또 다른 이는 학문의 한계와 공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6) 이같은 영향으로 인해 가장 현저히 나타난 것은 종교에 대한 열정이 급속하게 식어진 일이었다.

이처럼 교회적 상황은 철학적 상황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여러 해동안 교회는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중류층이나 상류층 사회도 비신앙적이 되어가기는 역시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7) 국가교회(Established Church) 역시 고도로 정치적인 일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제임스 2세의 딸이었던 Anne 여왕이 교회와 국가 사이의 연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교회 노선을 다시 한번 택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들은 큰 박해를 당했다.8)

교회적인 축일들은 존중되지 못했으며, 성만찬은 아주 드물게 시행되었다. 감독들과 성직자들은 타성적이며 세속적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의무들을 태만히 하였다. 당시 영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일부 비국교도들의 교회의식은 외면적인 형식주의를 넘지 못했다.9) 교회에는 유능한 설교가들도 혹 있었으나, 그들의 설교는 대개 도덕적 미덕에 관한 열의 없는 논문을 읽는 것 같았다. 교회 바깥의 불신자들에 대한  구령운동(救靈運動)은 거의 없었다.


  경제적 문제

18세기에 영국의 부는 엄청나게 증대했다. 산업혁명에 의해 저사회계층 속에서 신흥자산계급이 부상했으나, 그들의 재산은 토지로부터가 아니라 산업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계급이 부상한 중심지가 바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신흥도시 런던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부유한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소작인들과 빈곤한 사람들이 백성의 가장 큰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숫자는 18세기 동안에 현저하게 증가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학교교육과 직업교육은 전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들은 대부분 새롭게 생겨난 산업 지역이나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슬럼 지역에서 살았다.10) 이같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빈곤하게 된 원인은 특히 농민들이 국가 정책에 의해 토지를 박탈당하고, 산업화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감에 따라 일어나게 되었다.

이같은 기회에 편승하여 자본가들은 경쟁력을 잃은 소농민들의 땅을 취하였다. 점점 실업자들의 수는 증가했고 이로 인해 낮은 산업 임금이 유지되었다. 증기기관과 면직산업의 기계적인 작업도구들이 발명됨으로써 무수한 가내 공장들의 손노동이 기계노동으로 대체되고, 자연 수공업자들이 이전의 농민들처럼 불안한 임금을 의존하는 운명으로 전락되고 더욱 실업자들의 수는 늘어났다.

이런 중에 사업가들의 노동력의 착취, 퍼져가는 실업, 특히 광산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여성 노동, 어린이 노동, 및 저임금 등이 특별히 잔악해지거나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날 때면 국가적인 데모가 일어났고, 이 때 군중들의 흥분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가기도 했다. 이러한 정당한 항거를 유발한 원인을 제거하는 대신 관리들은 이러한 행동을 공공질서를 파괴하고 동시에 전통적인 특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대개 군대를 동원하여 데모를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중벌로 다스렸다.

사회 안에서 부유층의 태도는 주로 재산과 소유를 증식하고 보호하는데 관심할 뿐이었다. 국가도 교회도 사회도 많은 개인이나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백성들의 넓은 층으로 확산되어 가는 시급한 가난의 문제를 파악하지도 못했고 해결할 수는 더욱 없었다. 이들의 공적인 조치나 사적인 조치의 기본 동기는 물려받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지일 뿐이었다.11)

이 시대에 투기는 가장 확실한 축재(蓄財)의 방법이라는 호소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었다. 특히 식민지와 무역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들의 주권을 매입하는 일이 투자가들의 큰 일거리였다. 그러나 주가의 폭락이 다가올 때는 수많은 투자가들이 돈을 잃고 경제계는 큰 혼란에 직면하곤 하였다.


  노예 문제

18세기의 사회적 문제들 중에서, 급격하게 성장해 가는 산업화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위기들이 점차 강해지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예문제가 최악의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문제였으며 또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노예제도에 의해서 야기된 참혹한 양상은 비참하게 자유를 빼앗긴 아프리카 사람들을 실은 배와 더불어 증가되어갔다.

특히 아메리카에 있는 식민 농장에서 노동력의 요청이 점증함으로써, 이 중요한 경제 영역은 노예 수입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게 되었다. 정치인들과 노예 상인들과 및 노예 소유자들의 경제적인 계산이 다른 종족의 인간들을 노예화시키는 불법성에 대한 의식이 거의 전면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현상과 맞물려 노예제도라는 악을 부풀려 나갔다.12)


  부도덕성의 문제

청교도적인 제약들에 대한 강한 반발이 사회에서 일어났고 사회는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쉬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며 의도적으로 비도덕적인 일을 행하는 경향성이 성숙과 선을 추구하는 욕구를 질식시키고 있었다.13)

정부는 부패해 있어서,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학교들은 공공학교(public school)라 불렸지만, 사실은 오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만이 다닐 수 있었다. 18세기의 초기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14)

계몽운동의 낙천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편견(無偏見)은 종종 자칫 속기 쉬움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기성 관념을 재검토하려는 철학자들의 주장은 간계나 사기꾼 무리에게도 문을 열어둔 격이 되었다. 18세기의 유럽은 몽상가, 사이비 과학자, 가짜 의사들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여서, 그들은 교육을 받은 지성인들에게나 또는 무식한 사람들에게나 그럴 듯 하게 설득하곤 했다. 그래서 18세기의 학자들은 스스로 합리적이며 회의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반대로 남의 기만에 속기 쉬운 자들이 많았다.

무대 흥행은 사교계에서의 평소의 오락을 웃도는 것으로 하기 위해 매우 큰 규모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해지고 있었다. 교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극 관람에 열중했다. 18세기 영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옥내 경기는 노름이었다. 판돈의 규모도 상당했으므로, 큰 손해를 진 자는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할 때는 곧 투옥되곤 했다.

혼란이 소용돌이치던 런던에서는 낙천적인 당시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번져 가는 사회의 음주 분위기를 막을 길이 없었다.15) 의회가 금주법을 통과시켰을 때에는 이를 반대하는 폭도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반항하였다. 런던의 유흥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은 진(gin)이었는데, 18세기 초엽의 진 소비량은 잠깐 동안에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징벌을 받고 있는 수인들의 상황은 특히 참혹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국회는 사형 죄에 해당하는 범죄의 목록을 18세기 동안에 무려 200개 이상으로 확대시켰다.16) 그리고 분명하지 않은 소송절차와 소송 집행은 범죄자들에 대한 객관적인 처리를 어렵게 했다. 수인들의 비참한 상황은 비단 간수들의 잔인성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들의 열악한 사생활과 위생상태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인간의 생명은 경시되다 못해 차라리 하찮은 물건보다도 가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죄수를 가득 수용한 형무소는 질병이 만연한 곳이었다. 돈을 가진 죄수는 식대와 함께 숙박비를 물어야 했다. 연소 범죄자, 좀도둑, 채무자 등은 살인범이나 미치광이와 함께 수용되어지곤 했다.

도회적인 귀족이나 상인들의 주택으로서 훌륭한 저택들이 속속 세워지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런던은 불결하고 질병과 범죄가 난무하는 소굴이었다. 노상 강도와 소매치기가 들끓었으며, 공기는 석탄 매연으로 오염되었으며, 천연두로 인해 13명 중 1명이 죽어, 1740년의 런던에서는 장례식의 횟수가 세례예식 횟수의 2배를 넘었다.

이처럼 대다수 영국인의 영적 상태는 말이 아니었으며, 민중의 오락은 야비했고, 문맹은 만연되었고, 법률 집행은 야만적이요, 감옥은 질병과 죄악의 소굴이요, 술취함의 정도는 영국 역사상 최악이었으니, 마침내 영국 사회는 도덕적, 정신적인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다.


3. 부흥운동가 존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


  ‘신성클럽’의 사회 활동

18세기 영국 사회 안에서 부유층들의 태도는 주로 재산과 소유를 증식하고 보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뿐이었다. 많은 개인들이나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교회는 점차 백성들의 넓은 층으로 확산되어 가는 시급한 가난의 문제를 파악하지도 못했고 해결할 수는 더구나 없었다. 이들의 공적인 또는 사적인 조치의 기본 동기는 물려받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지일 뿐이었다.

존 웨슬리의 지도 아래 있던 Oxford의 ‘신성클럽’(Holy Club)의 사회적 활동은 후에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가 된 그에게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가 이 그룹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활동의 과제를 만났으며, 이를 기독교적인 삶의 본질적인, 그래서 결코 분리해 낼 수 없는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사회 활동의 동기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를 따름과 그의 계명들의 실천이 그 하나이고, 더 높은 목표 즉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확고부동한 권위에 대한 복종과 최고로 추구할 가치를 지닌 목표, 곧 자신의 구원에 도달하려는 요청이 상호 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聖化)란 사랑의 계명에 대한 복종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과제로서, 이것의 실천이 없이는 행복에의 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 첫 번째이다.17)

Oxford에서 시행했던 규칙적인 생활 이후에도 웨슬리는 이러한 사회활동을 그의 생애 동안 내내 지켰다. 나중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義認)이 그의 삶과 활동의 토대가 되었을 때 웨슬리는 그의 사회활동에 새로운 근거를 제시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Oxford의 활동이 한편으로는 웨슬리를 수도원적-금욕적 신앙에로의 침륜을 막아주었고 실천적 이웃사랑의 사명을 확신시켜 주었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활동이 행위 의(義)가 될 수 있음으로 좌절되었고, 그래서 후에 참된 근거를 찾아내도록 했다는 점에서 특히 변함없는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근거를 웨슬리가 발견한 것은 그가 Luther의 신학과 Herrnhut 형제들과의 만남에서 그가 찾은 의인, 즉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주는 개인적인 체험을 얻게 되었을 때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활동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하민층들로부터 새롭게 모아진, 즉 기존 교회에서 소외된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은혜의 복음 선포로 시작되었다. 웨슬리의 사회적 열정은 근본적으로 그의 가난한 이웃들의 사회적인 상황과의 내적인 전제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19) 웨슬리에 의하면 가난의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무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자신의 대중경제적 지식과 스스로 체험한 목격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빈곤에 대한 가능한 원인들을 밝혀내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20)

이처럼 초기 감리교가 수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회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웨슬리의 사회적 불의의 원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의 선포에 힘입은 덕분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선포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커다란 봉사적인 열정을 부여하였다.


  경제 활동과 그 정신

웨슬리는 사유재산권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사유권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소유권, 즉 인간은 한정된 시간 동안만 재산의 처리권을 소유할 뿐이며, 또 모든 재물의 사용에 대하여 분명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사유재산권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에 복종하기 위하여 재산을 사용하도록 분명하게 촉구하였다.21) 이러한 점에서 감리교 단체들과 개개 교인들이 점차 유복(有福)한 삶의 상태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주 놀라울 정도로 발휘한 희생정신이 설명되어진다.

웨슬리는 직업 선택의 우선적인 기준을 능력과 적성을 고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서 보았다. 재화의 획득과 직업 활동은 기독교적인 소명의 일부로서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22) 구체적으로는 사랑의 계명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 바로 이 높은 목표이다.

웨슬리의 직업 정신은 그 본질적인 진술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종교개혁자들, 특히 Luther의 직업 정신과 매우 유사하다. ‘가능한 한 많이 벌고 또 삶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저축하라’는 촉구가 유일하게 Luther의 전승에서 발견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의무 수행에 대한 평가. 영적인 직업과 세상적인 직업의 동등성, 노동을 기독교적인 삶 속으로 포함시키는 윤리적인 입장, 노동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보기는 하지만 인간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한 선행으로는 믿지 아니하는 신학적인 평가 등은 Luther에게 있어서나 웨슬리에 있어서 공통적이다.

근면과 절약 그리고 경제적인 성공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하여, 웨슬리는 매우 자주 이러한 발전을 유감스럽게 여겼으며 또 질책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발전은 소득 활동과 절약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은 삶에 필수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목적이다.23)

다른  개신교의 교파들과 함께 진정한 웨슬리사상이 자본주의를 촉진시키는 데 이바지한 유일한 공헌은 근면과 만족을 높이 평가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윤리가 갖는 의의를 강조했다고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신은 무제한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데 반해서 웨슬리는 부(富)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하였다. 전자는 자본의 축적을, 후자는 어떤 종류의 재물 축적도 거부한다. 전자는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반해서, 후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궁극적인 동기이다.


교육 활동

웨슬리의 직접, 간접적인 주도 아래 생겨났던 감리교의 학교들은 외적인 면에서 볼 때 전통적인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24)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의 학교 체제를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공인된 기본 교육의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공을 가져다 준 원인은 무엇보다도 확신 있는 그의 견해에 있었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고, 그래서 매우 중요한 교육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었다.

웨슬리의 교육 활동은 처음부터 어린이들로 국한되지 않았다. 성인들도 웨슬리의 교육 활동의 대상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이 발견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와 동일시되었다”25) 그러므로 웨슬리는 성인들에게도 지식을 전달하도록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교육시키려 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느낄 뿐만 아니라 온 삶과 행동을 위한 신앙의 결과들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인들을 위한 특별한 학교과정과 값이 싸면서도 적당한 문헌들을 구비하고, 그는 소그룹과 단체별로 대화를 나누고 또 설교를 함으로써 이러한 성인 교육을 발전시켰다.

웨슬리가 교육행위의 효율성과 연관하여 이러한 낙관주의, 즉 교육 행위는 본래적인 완전의 상실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메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는 인간 본성의 질병은 점차 치유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26) 그러므로 웨슬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교육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그 원래적인 모습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웨슬리가 이러한 그의 교육방법을 통하여 수많은 어린이들과 성인들을 근면하고 학식 있고 능력 있는 시민으로 교육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노예제도에 반대함

18세기의 사회적 문제들 중에서, 급격하게 성장해 가는 산업화로 인해 생겨나는 위기들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노예문제가 최악의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문제였으며 또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1774년에 웨슬리가 발표한 ‘노예에 대한 고찰’(Thoughts Upon Slavery)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웨슬리 자신이 노예들에 대하여 품고 있던 동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27) 웨슬리는 그의 동역자들과 함께 흑인 노예들을 위한 설교와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 그들에게도 세례를 주고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후 1780년 미국에서 열렸던 감리교의 첫 번째 연회는 노예제도를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 그리고 자연법에 어긋나며 사회를 해치는 것이라는 반대의사를 선언하였으며, 또 이에 덧붙여 노예제도는 양심과 순전한 종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며 또 남이 우리에게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28)


  재소자들에 대한 활동

웨슬리는 교도소에서 여러 차례 예배를 인도했고, 특히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과 수없이 대화를 나누며 기도했다. 이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내적인 평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29) 특히 웨슬리는 자기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신념 속에서 재소자들 역시 가난한 이들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였다. 웨슬리는 단지 재소자들에 대한 목회적이며 자선활동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그들에 대한 구호활동을 펴나갔다. 그는 여러 신문이나 단행본들을 통해 재소자들을 위한 다음과 같은 항의적인 변호의 글도 여러 차례 썼다;


      ▶재판정에서는 종종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을 서로 다르게 불공평한 처리를 한다.30)

      ▶재판과정이 너무 길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또 다른 법적인 불안을  가중시킨다.31)

      ▶대부분의 교도소들은 마치 ‘죽음의 계곡’처럼 불결하고 어둡다.32)

      ▶교도소는 벌받는 이들을 개선시키는 곳이 아니라 또 다른 범죄를 배우게 하는 곳이    다.33)

      ▶전쟁포로들에 대해 너무 비인간적인 대우를 한다.34)


웨슬리신학의 사회적 적용 원리

웨슬리는 선을 향한 욕망과 악에 대한 거부의 능력은 타락을 통하여 전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도덕법을 가지고 있다. 이 도덕법의 내용은 특히 이웃에 대한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심판하는 것이다. 양심은 도덕적 결단과 인간 자신의 견해와 행동에 대한 판단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에 그에게 만족을 주며 반면에 어겼을 때는 불안을 줌으로써 어떤 특정한 행동으로 유도하는 도구로 양심을 쓰신다.35) 이러한 내적인 점검(inward check) 역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이다.36)

인간의 내면에 찾아오는 근본적인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이 은총은 인간을 신앙으로 일깨우며 또 사랑의 힘을 준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이러한 실제적인 변화의 출발점은 모든 인간을 위하여 일어난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와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인에게 선사된 자기 인식과 하나님 인식, 즉 은총에 의해서 일어난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서의 인간의 갱신은 이제 인간에게 새로운 선한 행위들의 실천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 선한 행위는 의인(義認)을 위하여는 아닐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삶을 위해서는 필연적이라는 웨슬리의 강조는 은총이 방종으로 남용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칼빈주의와의 논쟁으로 인하여, 오직 믿음에 의한 의인과 선행(善行)의 필요성에 대한 웨슬리의 동시적인 강조는 가벼운 신인협동설(Synergism)의 방향을 피할 수가 없었다.37) 그것은 웨슬리가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에 있어서나 회개에 있어서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을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으로 보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확인했다는 점이다.38) 그의 이러한 신학적 사고의 변증은 그로 하여금 바울과 야고보를 서로 적절한 위치에 배열하면서, 오직 믿음에 의한 의인론과 선행의 필연성을 똑같은 강도로 주장할 수 있게 한다. 이로써 그의 사회개혁 활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형성될 수 있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적 성화(聖化)의 기본 동기이며 또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 속에서 일어나는 이웃 사랑, 즉 사회적 성화의 토대가 된다.39) 웨슬리에 의하면 완전한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태도’가 있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이다.40) 이러한 표현들은 웨슬리의 문헌 속에 성화와 기독교적인 실존의 본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이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도록 하는 데 있다.





4.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이 미친 사회적 결과들


노예제도 철폐

지난날 로마 제국이 노예 제도를 동반한 세계 지배로 인해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듯이, 만일 노예제도 철폐가 좀더 늦게 찾아왔다면 유럽은 스스로 멸망의 길로 향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적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은 영국 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부패와 멸망으로부터 구출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34년 8월 1일의 해방령(Emancipation Act)은 영국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수많은 노예들이 자유의 몸으로 선언을 받게 되었다. 영국이 지배하는 여러 식민지에서도 노예들에게 교회 출입과 예배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영국에서 노예 매매가 금지된 이후로 프랑스, 홀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지에 커다란 변화가 일게 되었다. 영국이 지니고 있던 해상권, 제국주의적 능력, 무역적 통치권 등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이런 영국의 입지가 주변국으로부터 빈축을 사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있어서 영국의 힘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강력했기에, 이같은 노예제도 철폐에 관한 영향은 유럽 전역은 물론 결국 미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물론 미국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노예를 계속 필요로 하는 주들에서는 이같은 영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활기차게 일어난 노예제도 반대운동에 대한 공헌은 퀘이커파(Quakers)의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17세기경에 벌써 그들은 노예제도를 묵인하는 기존 기독교에 대항하여 나섰다. 1724년에도 그들은 노예제도와 노예 매매를 정죄하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청교도인도 그의 「기독교인 지침서」(Christian Directory)에서 ‘노예 해적’을 인류 공동의 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런가 하면 영국 성공회 사제인 갓윈(Godwyn) 같은 이도 노예제도를 비난하였다.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도 같은 이같은 외로운 외침들이었지만, 마침내 강력한 영적 부흥이 영국 전역을 휩싸게 될 때 노예제도 폐지의 기적과도 같은 일은 성취되게 된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72년에 그의 일지(Journal)에 기록하기를, 정직한 한 퀘이커파 사람이 노예 매매의 부당성에 대해서 쓴 매우 색다른 책을 자신이 읽었다고 했다. 안토니 베네제트(Anthony Benezet)라고 하는 사람이 쓴 이 책은 웨슬리에게 엄청난 감명을 안겨다 주었다. 웨슬리는 영국의 노예 매매가 마치 모슬렘권에서 고통받는 크리스천 노예들이 당하는 잔인성의 도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라고 경악했다.41)

2년 후인 1774년에 그의 「노예에 관한 사상」(Thoughts Upon Slavery)이 발표되었다. 이 글이야말로 노예제도 반대에 대해서 쓰여진 글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41) 이 글이 씌어질 당시 이미 그는 당대의 종교 지도자 중에 가장 사랑 받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고, 그의 메시지는 즉각적으로 수천의 추종자들이 이를 실행에 옮기게끔 영향력을 끼쳤다.

미국에서 노예제도 폐지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여기에는 당연히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난점과 모순점들이 야기될 수 있었다. 애당초 미국의 노예제도는 영국의 규정을 따른 것이었고, 몇 세대를 거쳐가면서 이 제도는 영국의 노예 무역을 통해 성장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새롭게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캠페인이 영국으로부터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1833년에는 미국노예제도반대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가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은 50여년 전 웨슬리의 「노예에 관한 사상」(Thoughts Upon Slavery)에서 크게 고무되었다. 1850년경에 이르러서는 여러 복음전도자들 사이에서 노예제도 반대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1851년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과 같은 소설은 노예제도 반대의 경향성을 대중화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책 중의 책’이라고 하면서 항상 가까이 했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도 역시 부흥운동 설교가들의 메시지를 경청했으며, 결국 1863년 1월 1일 그는 모든 노예들에 대한 ‘해방의 선언’(Proclamation of Emancipation)을 공포하게 되었다.


대중교육의 기초들

복음적 부흥운동이 전 국가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대중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란 자비 학교들(charity schools), 사립 학교들(privately endowed schools), 부인 학교들(dame's schools) 그리고 비국교도들 사이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육 과정 등이 고작이었다.41) 비국교도들이 운영하는 학교들은 제도적으로 또 생존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었다. 반면에 돈 많은 특권층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에서 개인 교사를 통해 자녀들을 교육시키거나 아니면 공공 학교들(Public Schools)이라고 불린 곳에서 교육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공 학교들이야말로 그 이름과는 달리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학교였을 것이다. 영국의 진정한 대중적인 교육 제도의 기초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다양한 교육 제도들이 형성, 발전되어감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일학교 운동

1769년 웨슬리의 후원에 힘입어 한나 발(Hannah Ball)이 최초로 주일학교를 열었다. 그 후 1780년에 레이크(Raikes of Gloucester)가 스토크(Thomas Stock) 목사의 도움으로 주일학교들을 설립했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레이크의 주일학교가 대중 교육의 시작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정확한 시각이 아니다. 어쨌든 레이크의 주일학교들은 복음적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급속하게 성장해 갔고, 마침내 교육의 역사에 있어서 창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784년에 웨슬리는 ‘그가 어디를 가든지’ 주일학교들이 번창하게 되는 것을 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그의 순회 사역이 곧 각 지역의 주일학교에 큰 힘과 위로를 부여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85년에는 런던주일학교설립협회(London Society for the Establishment of Sunday Schools)가 형성되었고, 1803년에는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마침내 영국 전체를 관장하는 주일학교연합(Sunday School Union)이 탄생하게 되었다.

▶왕립 랭커스터 학교(Royal Lancastrian Institution)

조셉 랭커스터(Joshep Lancaster)는 복음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비국교도들을 위한 교육에 대한 꿈을 지니고 자라났다. 1798년에는 퀘이커교도가 되어 ‘새로운 방식’의 작은 학교를 열었는데, 이 학교는 종전과는 달리 제한이 없이 누구에게든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801년에는 런던에서 큰 학교 건물을 얻게 되었으며, 1805년에는 조지 3세(George III) 국왕으로부터 영국내의 모든 가난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왕립 랭커스터 학교(Royal Lancastrian Institution)가 설립되었으며, 급속하게 번창하는 가운데 많은 교사들을 만들어 내었다. 애당초 랭커스터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교육의 꿈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학교는 초교파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또 특정한 교파적 신조나 교리적 해석은 허락되지 않았다.

▶전국학교협회(National School Society)

랭커스터 학교의 놀라운 성장과 함께 랭커스터는 전국적으로 협회 지부를 구성하여 교회 학교를 만들어 내기에 힘썼다. 그래서 마침내 1831년에는 거의 13,000여개의 학교들이 전국학교협회(National School Society)를 구성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공장 학교들(Factory Schools)

공장 지역의 어린이들의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상태를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1833년 국가법에 의해서 공장 학교들이 운영되게 되었다. 9세 미만의 어린이들은 공장 일로부터 보호받으며, 13세 미만의 어린이들에게는 하루 9시간 이상의 고된 일이 금지되었다. 그 대신 남는 시간에는 이 어린이들이 공장 경영자들의 책임 하에 매일 두 시간씩의 공장 학교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어린이들은 주로 기독교 국가에서 지성적이고 유용하고 건강하며 행복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목들을 공부하였다. 부인들을 위한 공장 학교도 열렸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가내업과 기독교 문학에 대한 것을 공부하였다.

▶극빈자학교연합(Ragged School Union)

극빈자들을 돌보며 교육시키기 위한 극빈자학교가 1798년 크랜필드(Thomas Cranfield)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너무 가난하여 주일학교에 참석하기도 힘든 어린이들을 위해 주중(週中)에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1844년에는 40여개의 극빈자학교가 연합하여 극빈자학교연합(Ragged School Union)41)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학교들의 정신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적, 문화적 교육에 있었다.

▶1870년의 학교위원회 법령(Board School Act)

1870년의 학교위원회 법령은 대중교육에 있어서 ‘자발적으로 발전된 제도를 온전케 하고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1876년과 1880년에 이어서 발표된 법령에 의해서 더욱 그 효력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처럼 영국 대중교육의 발전에 있어서의 이 자발적인 힘은 복음적 부흥운동의 영향 아래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서, 신앙의 힘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성장을 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신앙의 힘은 단지 영국의 대중교육 발전의 개척자 역할만 한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교육 그 자체의 중심 관념을 형성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것이다.


창조적 사회 활동들

19세기를 특징 지운 첫 번째 승리가 노예제도 반대의 승리라고 할 것 같으면, 이에 따라 나타난 정치적, 종교적, 자선적(philanthropic) 그리고 문화적 승리들이 그 뒤를 장식하였다. 존 하워드(John Howard)는 분명 18세기 부흥운동이 만들어 준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복음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비국교도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교파분리주의적인 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열렬한 웨슬리의 제자였으며 부흥운동의 뜨거운 조력자였다. 하워드는 웨슬리의 집회에서 ‘무엇이든 너의 손으로 할 일을 찾았으면 이를 성심으로 하라’41)는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았다. 그때부터 하워드는 재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극악한 교도소 제도를 인간화하는 일에 열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워드는 ‘현대 교도소 개혁의 아버지’라고 부를만 할 정도의 공헌을 하였다.

웨슬리는 하워드의 영웅적인 교도소 개혁운동을 보고 ‘유럽 제일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워드의 뒤를 이어서 퀘이커파 목회자였던 프라이 여사(Mrs. Elizabeth Fry)가 교도소 개혁의 일을 계속해 나갔고, 그 후에도 복음적 부흥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여러 인물들에 의해서 형법(刑法)상의 개혁이 계속 진행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에서 의료 혜택과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자발적인 병원 제도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복음적 부흥운동의 때로부터이다. 영국에서 최초로 자유로운 약국(medical dispensary)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웨슬리다. 그는 최초로 가난한 자를 위한 자유로운 전기 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청결하고 건강하게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개신교 해외선교의 시작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교리적 논쟁과 지역적 갈등 그리고 개혁신앙을 확립하는 일 등으로 인해 해외선교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이같은 점은 17세기 청교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청교도들은 국교회로부터의 분리로 인한 정체성의 확립,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를 예정된 소수의 무리라고 보는 신념 등으로 인해 해외선교의 동기는 적었다. 미대륙에 뉴잉글랜드(New England)를 설립한 청교도 선조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비록 개신교 해외선교의 첫 영예를 얻게 된 것은 물론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들의 이주는 선교가 아니라 피신(避身)이었다.

그러나 존 엘리오트(John Eliot) 같은 이는 진정한 해외선교의 사역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북미 인디언들 사이에서 그들의 언어로 설교를 했으며, 그들 중에 교회를 세웠으며, 성경을 그들의 말로 번역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신앙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어떤 경우에도 진정한 해외선교의 단체가 구성되진 않았지만, 독일 모라비안파(Moravians)의 경우에는 달랐다. 경건주의 운동의 여러 가지 약점에 대해 비난하면서, 그들은 1732년에 해외선교의 첫 출발을 하였다. 웨슬리가 처음에는 조지아에서, 그리고는 런던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독일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가졌을 때, 웨슬리가 그들로부터 받은 선교적 감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라비안파야 말로 개신교 해외선교의 선구적 단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사역은 너무 협의적이고 비조직적이고 또 비조력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오래 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 대신 웨슬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18세기 복음적 부흥운동의 확산으로 인한 선교활동은 조직적이고도 영속적인 개신교 해외선교운동을 열매 맺게 되었다.41)

코크 박사(Dr. Coke)는 웨슬리가 이끈 부흥운동의 해외선교 책임자였는데, 그는 1786년에 감리교선교회(Methodist Missions)를 만들었는데, 이 조직은 순식간에 여러 섬들에 복음을 확산시켰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지역에서 노예제도 반대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감리교(Methodist Societies)는 처음부터 선교적 조직이었는데, 부흥이 점차 확대되어감에 따라 비국교도들의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1792년에 캐리(William Carey)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창설하였고, 이 단체가 1795년에 초교파적인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로 발전하였다. 1796년에는 스코트랜드선교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가, 1799년에는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설립되었는데, 이 모든 해외선교회들은 웨슬리의 해외선교의 정신과 공헌에 힘을 얻어 탄생하게 된 것이다.


YMCA와 구세군 창립

복음적 부흥운동의 여파 속에서 생겨난 지속적인 복음기관 중에 1844년에 윌리암스(George Williams)가 세운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있다. 윌리암스는 어릴 때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apel)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으며, 그의 나이 16세기 되던 1837년에는 회심의 경험을 하였다. 그후 그는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인 피니(Charles Finney)의 저서들로부터 큰 영적 감동을 받게 되었다.  윌리암스는 특히 산업화의 과정에서 도시로 몰려든 시골 청년들을 복음화하고 돌보는 목적을 가지고 런던에서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그의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 모임이 YMCA라는 이름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의 창설자인 부스(William Booth)는 안수 받은 감리교 목회자였다. 1864년에 그는 ‘희망 없는 자들’(the hopeless)에게 손길을 뻗기 위해서 동부런던부흥협회(East London Revival  Society)를 창립하였다. 이 협회는 1878년에 재조직되어 ‘구세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구세군은 복음적 부흥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게 되었다. 구세군은 단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르침 뿐 아니라, 사회봉사 면에 있어서도 괄목할만한 사역을 감당해 왔다. 집없는 노숙자들을 위한 잠자리들을 마련하는 일, 배고픈 자들에게 매일 양식을 제공하는 일, 실직 당한 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 등 구세군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으로서 감당하였다.



5. 결론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그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사(社會運動史)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하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41) 이같은 웨슬리 사회개혁 활동의 출발점은 사회의 구석구석의 어두움을 자세히 주목하고 관찰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이성적인 상황 분석의 능력에 있었다. 그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실천적인 결과를 열매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동기와 행동의 교훈들을 주었다. 웨슬리의 원리는 오늘날의 윤리적인 반성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실천 속에 포괄적인 사회적인 책임을 고취시키는 일을 위해서도 귀중한 동기를 제공해 준다.

사실 이 모든 사회적인 개혁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능력을 확신한 기관들의 자발적인 사역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이 유럽의 반에 해당되는 지역에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가져다주었다면, 복음적 부흥운동은 영국과 영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에게 이 모든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Bready는 현대 영어권 세계의 민주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유산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성취보다는 훨씬 더욱 영적인 운동의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42) 이는 분명히 총체적인 파산지경을 경험하고 있던 영국 사회가 새롭게 소생하게 된 데에는 영적 부흥운동이 준 커다란 힘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대중 속에서 웨슬리로 시작하였던 복음적 부흥운동은 비록 다른 것들에 비하여 무척 무시되었지만, 사실은 “전 영어권 세계에 걸쳐 자유정신을 생성시키고 유지시키게 한 정신과 성격의 참다운 모체였다고 하는 점”43)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복음적 부흥운동의 정신은 영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에게 인생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해 주었고, 또한 사회봉사의 중요성에 관한 수많은 선언들이 발표되도록 그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어권을 사용하는 세계에 있어서의 웨슬리 부흥운동의 가치는 종교개혁 이상의 의미를 지닌 지대한 것이었다.

이같은 웨슬리의 사회 윤리의 저변에는 믿음과 행위의 이 두 개념의 결합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즉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 전체를 지속적인 성화를 향해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면 이 믿음은 더 이상 존속되지 못할 커다란 위험에 빠진다. 그러므로 믿음의 올바른 실천은 기독교적인 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참된 믿음에 속한다. 그에게서는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참된 조화를 발견하게 되며, 교회의 내향적 기능인 영적 요소의 개화(開花)가 교회의 외향적 기능인 사회적 요소로 열매맺는 것을 본다. 이같은 성숙된, 그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잘 인도되어진 신앙의 교훈이야말로 윤리성의 고갈로 인해 갈등하고 있는 현대 한국교회가 갈급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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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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