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3) 무디 부흥운동의 시카고

기사입력 2006.05.03. 오후 3:42

 

 


무디 부흥 운동만큼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앙운동도 드물 것이다. 1875년부터 4반세기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영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던 무디 부흥 운동의 중심무대는 미국 시카고다. 이곳은 필자에게는 매우 낮익은 곳이다. 5년간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시카고는 마치 제2의 고향과도 같다. 무디 부흥 운동의 발자취를 찾아 다시 시카고를 찾은 것은 2005년 여름이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무디성경학교를 찾아 시카고 다운타운을 향해 달리는 동안 하이웨이 위에서 바라본 시카고의 전경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예술작품으로 눈앞에 다가왔다. 미국에서 가장 높다는 시얼스 타워를 중심으로 크고작은 마천루들이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모습은 도시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왜 건축가들이 시카고를 예찬하는지 알 수 있는 듯했다.



지금부터 100년전 무디가 활동하던 시대의 시카고 모습을 상상하며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무디의 체취가 가득 남아 있는 무디성경학교로 향했다. 무디성경학교 안에는 무디박물관이 있어 19세기 하반기에 영적 각성과 해외 선교 운동을 이끈 무디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무디는 참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무디는 1837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세도 채 되기 전 하루에 1센트를 벌기 위해 이웃집 소를 데리고 들에 나가 풀을 뜯겨야 했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무디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홀어머니 밑에서 8명의 가족과 함께 힘겹도록 가난과 싸웠다.

정상적인 교육을 포기한 무디는 1854년 17세 때 보스턴에 있는 자신의 삼촌 홀톤스의 구두가게에 취직했다. 여기서 일하던 1855년 4월21일,그에게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날 그가 다니던 교회의 교회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이 구두가게를 찾아와 일에 지친 그에게 따듯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다.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무디의 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회심한 그날 오전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태양과 새들,그리고 모든 것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무디는 1년 후 시카고로 이주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 연 1000파운드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거리에 방황하는 수백 명의 도시 젊은이들이 무디의 설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현숙한 아내 유그노 에마 레벨은 그의 사역에 동력을 제공했고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젊은 공무원 생키와의 만남은 무디의 사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무디가 시카고 빈민가에 설립한 교회는 생키가 합류하면서 영적 품격을 달리 했다. 영혼을 살리는 생키의 찬양이 동반된 무디의 부흥집회는 무디를 일약 대표적인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생키의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연 회중은 3R,곧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으로 대변되는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구원의 은총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복음의 열정에 불타던 무디는 두 차례 영국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 조직도,자금도 준비되지 않은 채 영국 리버풀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은혜로운 찬양과 서민적이면서도 강력한 복음 메시지를 통해 리버풀 요크 뉴캐슬 런던에 이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고 그의 설교는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영국인이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겠다는 매우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무디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무디와 생키로 인해 버밍엄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회중에게 옮아붙는 듯했다. 평이하면서도 결단을 촉구하는 무디의 메시지는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무엇보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82년 11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열린 무디의 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이 화려한 장래를 뒤로 하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이때였다. 그 현장을 방문했을 때 열정을 토하는 무디의 설교와 기도의 함성이 12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내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디 부흥의 영향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디는 무디성경학교와 마운트 헐몬 학교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양성하고 존 모트와 로버트 윌더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해외 선교의 불을 지폈다.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역시 무디 부흥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해외 선교를 자원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미국은 영국을 앞지르고 해외 선교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00년 4000명에 불과했던 미국 선교사 수는 4반세기가 지난 1925년에는 1만4000명으로 급증,영국을 훨씬 앞질렀다.

무디의 부흥은 세계 근대 선교를 앞당겼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에 불타 5대양 6대주로 달려갔다. 그중에 아시아는 선망의 선교지였고 조선은 가장 선호하는 나라였다. 돌이켜볼 때 무디 부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이었다.

제임스 게일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무디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고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던가! 1888년 게일이 한국을 향해 북미를 떠나기 바로 전날 51세의 무디는 게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지의 나라로 향하는 한 젊은이를 이렇게 격려했다. “자네 조선으로 간다지. 내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마포삼열,윌리엄 블레어,그레이엄 리,스왈른,찰스 번하이젤,윌리엄 헌트 역시 무디 부흥을 경험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타 조선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이 땅에도 거룩한 부흥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구름처럼 생겨났고 마침내 평양과 한반도 전역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비록 무디는 한번도 이 땅을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흔적은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한반도 구석구석에 깊게 배어 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제2의 무디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오 주님,그같은 인물을 어서 속히 보내주소서!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09:47
  • 수정 2021.03.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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