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3) 하웰 해리스

기사입력 2006.07.12. 오후 3:14

 

웨일스는 근대 영적 각성 운동의 진원지였다. 근대 칼뱅주의 영적 거장 로이드 존스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토머스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에서는 1740년대,1859년,1904년에 대부흥이 일어났다. 특히 1740년대 전후에 일어난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은 조너선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영국의 웨슬리 부흥운동,조지 휘트필드의 칼뱅주의 부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매우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인공은 하웰 해리스였다.

해리스가 세상을 뜬 지 200년이 됐던 1977년 로이드 존스는 해리스야말로 “기독교회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해리스만큼 18세기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운동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인물도 드물다. 해리스의 발자취를 찾아 웨일스의 트레베카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트레베카로 가는 길의 웨일스 풍경은 왠지 낯익었다. 넓은 구릉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진 웨일스 지역에는 울창한 숲 대신 1월임에도 초록색의 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그 초원에서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크고작은 구릉과 광활한 푸른 초원이 잿빛 하늘과 대비를 이루며 펼쳐진 웨일스의 시골 풍경은 이색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흩어져 있는 양들을 우리에 모으는 일에 숙련된 웨일스인들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도 강렬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웨일스 부흥을 설명하는 웨일스 부흥운동 연구의 권위자 에이비온 박사,웨일스복음주의신학교 학장 얼 데이비스 박사,교수 기파드 박사에게서 부흥을 사모하는 열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로이드 존스와 뜻을 같이 하며 수십년을 한결같이 웨일스 부흥을 위해 기도해온 웨일스 출신 신학자들이다. 18세기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한 칼뱅주의 감리교 후예들이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칼뱅주의 감리교 운동의 주역 하웰 해리스의 체취가 가득한 트레베카였다. 18세기 초 영적으로 침체된 웨일스에 놀라운 각성 운동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 해리스가 마지막 사역을 했던 탈가스 근처 트레페카 칼리지에는 해리스의 흔적이 아직도 짙게 배어 있었다. 하월 해리스는 1714년 트레베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773년 세상을 떴다. 트레베카에는 그가 태어난 고향,그가 다녔던 학교,그가 사역했던 학교에 이르기까지 해리스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해리스 기념판에는 “그의 능력이 충만한 설교는 수많은 영혼을 회심시킨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며 웨일스 전역에 신앙의 각성을 일으켰다”고 기술돼 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강대상과 기물들이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하웰 해리스는 웨일스의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인물이었다. 21세 되던 1935년 봄 갑자기 찾아온 그의 극적인 회심은 거대한 칼뱅주의 부흥 운동의 사실상의 출발점이었다. 이것은 그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학교 교사로 일하며 탈가스 교구 교회에 참석하던 1735년 봄 교구 목사가 광고 시간에 한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 “만일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면 기도하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하다면 죽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입니다.” 이 광고가 해리스의 잠자는 영혼을 깨웠다. 비록 죄된 생활 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해리스는 교구 목사의 그 한마디에 영적 가책을 느꼈다.

다음 주일 성찬식 예배에 참석한 그는 죄의식을 깨닫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같은 현상은 5월25일 성령강림주일 성찬식 때까지 거의 2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이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은 그를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인도했다.

1735년 6월18일 해리스는 랭커스터 교회의 종탑 안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다가 또 한 번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갑자기 내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내 영혼 속에서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아바 아버지’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나는 그의 자녀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을 알았다.”

영적 각성은 강하고 깊었다.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해리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후 모든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순전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의 가슴은 복음으로 충만했고 은혜의 세계를 사모하는 열정이 그의 전인격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이후 해리스는 새벽 2시까지 취한 사람처럼 혼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도저히 반항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강력한 급류처럼 주께서 그를 압도하시는 것을 경험했다.

강력한 성령 임재와 충만을 경험한 해리스는 곧 로이드 존스가 표현한 대로 ‘불타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심령은 성령 충만을 경험한 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원 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삼킬 만큼 강렬했다. 구령의 열정으로 그의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고 성령 충만한 해리스가 외치는 설교는 놀라운 능력과 권능이 수반되었다.

그가 외치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임했다. 해리스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주께서 능력으로 임하셨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이제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우리집으로는 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말씀을 전할 때 큰 능력이 함께 임하여 그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1737년 하웰 데이비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해리스의 설교를 듣고 죄를 각성하고 회심을 경험했다. 윌리엄 윌리엄스도 1738년 탈가스 교회 뜰에서 하웰 해리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웨일스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 전파에 헌신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의 불길은 웨일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1750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웨일스에서는 화려했던 그 옛날의 영광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18세기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을 이끌었던 다니엘 로랜드,하웰 해리스,윌리엄 윌리엄스가 섬기던 교회는 2세기 반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 보존돼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영광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토록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교회가 이토록 영적으로 메마를 수 있는 것인지 정말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는 웨일스에 다시 한 번 그 옛날의 영광이 재연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10:18
  • 수정 2021.03.2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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