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순교와 평양대부흥운동


4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 평양은 수려한 자연경관, 적당한 강수량, 좋은 기후, 수 천년 동안 다져온 문화기반을 바탕으로 한반도 전 역사를 통해 북방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고조선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평양은 계속 수도 혹은 북방의 주요 도시로 자리 잡았고, 이름도 왕검성(王儉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서경(西京), 호경(鎬京), 유경(柳京)으로 변천되어 왔으며, 조선시대는 평양안도 관찰사가 주재하는 관서지역의 중심지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만 해도 영적으로 기생과 환락의 도시였던 평양은 그후 기포트(Daniel Gifford)가 말한바 놀라운 전진운동과 부흥운동을 통해 그로부터 불과 15년도 채 되지 않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탈바꿈하였다.


1. 평양교회의 초석, 토마스의 입국


1863년 12월 매서운 혹한이 몰아치는 그 추운 겨울, 런던 대학을 졸업한 한 젊은 선교사가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와 함께 중국 땅에 도착했다. 임신 중인 아내가 이국생활에서의 오는 충격에다 영국의 기후와 맞지 않아 심한 고생을 하자 그는 아내를 위해 더 좋은 기후를 찾아 중국의 남부 한구(漢口)로 내려갔다가 그곳에 서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비보를 들었다. 아내의 죽음 그 임종의 현장도 지켜보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것이다. 23살의 젊은이를 그 슬픔을 감내할 수 없었던지 1864년 4월 5일 자신을 파송한 영국 런던선교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캐롤라인이 지난날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 더 이상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이 젊은이는 선교도 시작하기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말했던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국에서 아내를 잃어버린 23세의 젊은이의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바로 이 젊은이가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30-1866) 선교사였다.


2.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에서의 토마스 순교


아내를 잃은 충격에 잠시 사로잡혔던 토마스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 담당자 윌리엄 알렉산더(William Alexander)를 만나 선교에 대한 열정을 재충전한 후 1865년 9월 황해도 창린도(昌麟島)에 와서 2개월 반을 머물다 돌아갔다. 한국선교를 불태우며 내한 기회를 찾고 있던 그는 1866년 8월 중무장을 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다. 동양인 19명, 서양인 4명도 그와 함께 승선했다. 입국하면 안 된다는 박규수가 파송한 문정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평양을 향해 대동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왔다.


토마스는 배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뭍에 내려 장사포(場沙浦)의 홍신길, 석호정(石湖亭)의 김영섭, 김종권, 만경대의 최치량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가지고 온 중국성경을 전해주었다.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셔먼호에 가둔 것을 계기로 셔먼호와 군관의 대치가 불가피했고 며칠 후 양각도에 좌초한 셔먼호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셔먼호에 탔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뭍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군관들이 그들을 처형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가지고 뭍으로 올라온 토마스는 모래사장에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얼마동안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朴春권)에게 성경을 받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병졸은 성경받기를 거부하고 이내 그를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26살의 토마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 후 아내의 뒤를 이어 하늘나라에 갔다.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3. 토마스의 순교 위에 세워진 평양교회


순교는 교회의 씨라고 했던 터툴리안의 증언처럼 토마스의 순교 역시 평양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은 훗날 예수를 믿고, 영주교회 영수가 되었고 그의 조카 이영태(李榮泰)도 주님을 영접하고 평양숭실대학에 진학 레이놀즈의 조사가 되어 우리가 갖고 있던 한글성경 3분의 2를 번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리고 박춘권에 앞서 토마스로부터 한문성경 3권을 건네받은 12세의 최치량(崔致良)은 성경이 금서(禁書)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나 그것을 평양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건네주었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건네받고 성경으로 자신의 집을 도배하였다.


인류 역사상 성경으로 도배한 최초의 집, 방에 들어가면 보기 싫어도 보이는 것이 성경 말씀뿐인 이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박영식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었고, 그 집에 자주 놀러왔던 최치량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성경으로 도배한 이 집이 바로 1907년 1월 14일과 15일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 전신, 평양 최초의 장로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평양대부흥운동과 토마스의 순교가 이렇게 연결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1866년 로버트 토마스의 순교는 평양 개신교의 연원이자 한국개신교 선교의 서막이었고 훗날 평양대부흥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그 후 평양에는 1894년 윌리엄 제임스 홀이 그리고 1895년에는 평양 근처 소래교회에서 메켄지의 순교가 이어졌다. 순교의 피가 흘려진 평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이다. 오 주님! 이 땅에 놀라운 부흥운동을 허락하시어 그 순교의 도시 평양이 다시 거룩한 도성,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거듭나게 해주옵소서!


목회와 신학 칼럼-2005년 2월.hwp[C:My Documents]-한글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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