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조대준 목사 (필라델피아WTS, Ph.D.)

16세기 영성가 아빌라 테레사가 부엌에서 닭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에 닭고기를 움켜쥐고 입술에 닭기름을 묻혀가며 아주 맛있게 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때 수녀 한 사람이 부엌에 들어왔다가 이 광경에 충격을 받고 말문을 잃었다. 이때 테레사가 말문을 잃은 수녀에게 말하였다. “닭고기를 먹을 때는 닭고기를 먹는 데 집중하고, 기도할 때는 기도하는 데 집중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런 테레사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현대 신자들은 영성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21세기 신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인데, 아직까지 이 단어에 대해 모든 복음주의 교회들이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확한 정의가 없다.

필립 셀드라키는 그의 저서 「영성과 신학(Spirituality And Theology)」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는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정의하기는 힘들다고 언급을 한 다음, 이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 무려 31페이지를 소모한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이 단어에 대한 해설이다. 사이먼 찬도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에서 영성은 영과 말씀의 체계에서 나오는 삶의 방법이라고 간단히 언급을 하고는 영성신학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의를 내린다.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영성신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더 쉬웠던가 보다. 디오게네스 알렌도 그의 저서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에서 영성신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만 영성에 대한 정의는 모호하기만 하다. 복음주의 신학사전은 영성을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 상태라는 피상적인 정의를 내린다. 토마스 머톤은 영적인 삶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고, 헨리 나우웬은 영적인 삶은 우리를 세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깊이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윤리적 실존이 최고의 영성의 표현이라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에 대하여 말을 하는데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정확하고 포괄적이고 간결한 정의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현대 신자들의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 중 하나는 리차드 포스터이다. 그가 1978년에 출간한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Discipline)」은 20세기 10대 크리스천 대작 중의 하나라고 불린다. 그러면 이 책에는 영성에 대한 정의가 있는가? 여기서도 영성에 대한 정의를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현대 신자들은 영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영성을 추구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영성은 교리와 관련이 있으나 영성은 실질적인 면을 포함하기 때문에 교리처럼 이론으로 배울 수가 없다. 영성이라는 말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20세기 말에 들어와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는 이 말이 새로운 것으로 들리나 영성은 가톨릭 교회나 성공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쓰이던 말이다.

자전거에 대하여 말을 하려고 하면 자전거를 타본 사람이 자전거에 대하여 정확하고 실질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성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말을 하려고 하면 영성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 영성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체험하는 가장 길은 앞서간 탁월한 기독교 영성의 거장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 일이야 말로 로이드 존스가 말한바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는 길이다.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인식하고, 체험하는 영의 감각과 여기에 근거한 삶의 모습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임재를 말하는 것은 타 종교나 심지어 불신자들도 영성이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성이라는 말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속사회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한다. 영성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을 더 깊이 체험하고, 삶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사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이것 말고 다른 영성은 없고, 이것 말고 다른 목적은 없다. 기독교 영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기독교 영성 이해의 첫 출발은 영성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영성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말은 우리가 영성을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 큰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영성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위로부터 크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영성은 테크닉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테크닉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상한 마음이다.

둘째, 영성은 성경과 일치한다. 즉,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거나 상반되는 기독교 영성은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된다. 기독교 역사를 빛낸 영성의 거장 중에 한 사람도 성경을 경시 여기거나 성경에 일치되지 않는 주장을 한 사람이 없다. 이들은 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생명을 걸었다. 물론 영성은 체험을 포함하지만 체험은 항상 성경과 일치한다.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체험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성경보다 체험을 내세우는 신자들은 아빌라 테레사와 십자가 요한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신비한 체험을 주시는 것은 신자가 성경을 더 바르고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지, 성경을 경시하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성의 거장들은 다 성경에 나온 심오하고 신비한 진리를 체험하였지, 성경 외의 것을 체험하지 않았다.

셋째, 참된 영성의 삶은 겸손으로 나타난다. 깊은 영성의 소유자가 교만의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 아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덕목도 겸손이요, 두 번째 덕목도 겸손이요, 세 번째 덕목도 겸손이라고 말했다.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 영적으로 교만하기 쉽다. 그것은 신비한 체험을 하면 우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의 피를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해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나의 미천함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중화시켜야 한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신자의 교만함 때문에 일어난다. 많은 현대 신자들이 영성을 카리스마적 능력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영성의 삶은 종의 모습으로 낮은 대로 내려가는 것이지 사람들 위에 올라가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영성의 삶을 사는 자는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시키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삶 속에서 구현한다. 영성의 사람은 교단이나 교회에서 피스메이커(peacemaker)이지 분열주의자가 아니다. 영성의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실천이 그 핵심이다. 자기 주장이나 이기주의적 욕심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고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영성의 삶을 진실로 추구하는 교회는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된다. 신자는 불의와 거짓과는 타협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형제 자매를 용서하고 관용하고 받아주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다섯째, 따라서 영성의 삶은 자기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한 희생의 삶이 수반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영성이라고 볼 수 없다. 영성은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삶에서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참 영성을 지닌 신자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한 삶이 나타나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사는 신자에게는 참 영성이 있다.

(정리: 박용규 교수)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1.29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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