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사 그레고리(약 335~394년)의 영성

 

조대준 목사 (필라델피아 WTS, Ph. D. )

 

닛사 그레고리는 바실과 나지안저스 그레고리와 함께 유명한 3명의 갑바도기아 신학자 중의 하나이다. 바실은 교회 행정가로, 나지안저스 그레고리는 시인으로 알려진 반면, 닛사 그레고리는 사상가와 신학자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닛사 그레고리는 갑바도기아 신학자들 중에서 대표되는 신학자이며, 또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레고리는 당대 최고의 지성과 열렬하게 하나님의 신비로움에 들어가고자 하는 깊은 영성을 소유한 신학자였다. 이 시대에 성경 지식과 신학 사상과 교리적 논쟁으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를 방어하고 이것을 후세의 교회에 전수한 대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신비하고 직관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연구하였던 영성신학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레고리를 기독교 신비신학 혹은 영성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으로 그는 얼음같이 뾰족하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지성과 하늘로 활활 타오르는 불 같은 영성을 동시에 소유한 대 신비신학자이다.

그레고리는 저명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실 장로로 알려진 독실한 신자이고, 앞에 언급한 갑바도기아 신학자 중 하나인 바실은 그레고리의 형으로 후세의 교회에 대 바실로 알려진 교회 지도자이고, 그의 누이는 성 마크리나로 알려진 헌신과 희생으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위인이다.

그레고리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수사학을 공부하고 수사학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372년에 바실의 권유로 닛사의 주교가 되었다. 374년 로마 황제 발렌스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지만 황제가 죽은 377년에 닛사로 돌아왔다. 3년 귀양살이 동안 그레고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는지 영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닛사에 돌아온 그는 타고난 지성과 하나님과의 신비한 체험에서 얻은 영성으로 신학 사상을 정립하고,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신학자와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레고리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그가 방어하고 정립한 교리들은 현대 교회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레고리는 인간은 하나님께 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성향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세에 인간 안에 신성 의식이 있다는 칼빈의 가르침은 그레고리에게서 얻은 사상인 듯하다. 그레고리는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즉, 인간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제거하면서 점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에 의하면 인간은 신앙의 삶을 살면서 빛과 구름과 암흑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빛(출 19:18), 암흑(출 20:21), 구름(출 24:15~18)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과 같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 모세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리 가까이 가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우리는 '맑은 정신의 술 취함', '깨어 있는 잠', '열정 없는 열정', '빛나는 암흑'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보며, 알지 못하지만 안다고 가르친다. 그레고리의 이런 역설적 표현은 고도의 신학 사상과 깊은 영성이 교차하는 데서 하나님 만나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암흑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참의미를 갖게 되었다. 고도의 사상가이며 깊은 영성을 지녔던 파스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레고리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결과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사역자들에게 독신으로 사는 삶을 권하였다. 그는 닛사의 주교가 되기 전에 결혼하였으나 아내와 사별한 후에는 독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결혼은 비극이고 죽은 몸을 생산해 내는 육체적 결합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그레고리만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로맨틱한 사랑을 병으로 보았으며, 결혼은 사회의 시민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의 사회 제도로 보았다.

그레고리는 세상의 삶은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경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에 빠졌고,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사랑하는 것에 빠졌고,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에 빠졌고, 어떤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에 빠졌다. 그러나 가장 저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배, 즉 식욕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레고리가 60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거듭난 신자라고 말하면서 국민의 60퍼센트가 비만증에 걸려 있는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그레고리는 오리겐과 같이 성경의 아가서를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깊은 관계를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영혼은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두운 데에서 빛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영혼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들어오면서 숨겨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이 두 번째 거치는 구름 속을 지나는 과정이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지식이 있는 은밀한 방에 들어가게 된다. 이 방은 인간의 모든 지성과 감성을 초월한 신성한 암흑으로 둘러싸인 방이다. 여기서 영혼은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명상을 한다. 그레고리에 의하면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암흑으로 들어간 것같이,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암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출 20:21).

그러면 암흑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레고리는 하나님은 영혼에게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어떤 감각을 주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각에 잡히지 않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신비로운 감각이 영혼에 전달된다. 하나님을 만난 영혼은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한 번 충만하게 된 영혼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그레고리는 이것을 충족된 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부족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만족은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사라져 가지만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오는 만족은 약해지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레고리는 이런 만족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움직이는 충족된 부족이라고 부른다(고후 3:18). 그레고리의 말처럼 이 땅의 모든 기쁨은 사라지는 기쁨이다. 새 차를 산 기쁨도 한 달이 지나면 시들해진다. 결혼을 할 때의 환상적인 기쁨도 6개월 이상은 못 간다.

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움직이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움직이는 기쁨을 이 세상의 것으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지만 뜨거운 사랑에 빠진 연인의 관계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 연인인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너무나 좋고 기쁠 것이다. 두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지만 한 번 만나면 그 기쁨은 일주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일주일마다 다시 만나는 것은 일주일 동안 기쁨이 식어서 그것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날 때마다 더 큰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과 기쁨의 관계가 결혼할 때까지 지속된다. 결혼한 후에는 왜 이런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부인 신자와 신랑인 그리스도의 관계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움직이고 기쁨에서 기쁨으로 움직이는 충족된 부족의 관계이다.

그레고리는, 신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화살에 맞아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신자는 사랑의 화살로 죽어가지만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가 된 신비한 관계에 있다. 신자는 이런 신비한 관계를 지성과 감성을 초월한 빛나는 암흑 속에서 체험하게 된다. 다윗이 이런 체험을 하였다고 그레고리는 말한다. 다윗의 영혼은 지성과 감성을 초월하여 환희 속에서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소리쳤다(시 116:11).

그레고리는 인간은 육의 감각과 영의 감각 두 종류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두 입술이 서로 마주쳐서 입맞춤이 되는 것처럼 영의 감각과 말씀이 마주쳐야 한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레고리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단순한 양식이라도 인간의 지혜와 상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학문에 능통한 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에게서 영의 감각을 통해 오는 직관적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레고리의 성경 해석을 보면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어떤 해석은 이 땅의 지혜와 지식에서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찬란하고 신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레고리는 영성을 추구하고 체계화한 인물이다. 최고의 지성을 가졌지만 그는 항상 하나님에게서 오는 직관적 지식을 사모하였다. 현대의 영성가들은 그레고리에게서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반이성적이고 반윤리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영성은 초감각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반감각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영성을 추구하였다. 말씀 밖에 있는 세계나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그레고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 영성은 말씀 속에 있는 신비한 비밀을 깨달아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관계에 더 깊이 들어가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지성과 말씀을 무시하고 감성과 무드를 강조하는 영성이 아니라, 고도의 지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영성이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1.03 09:54
  • 수정 2020.12.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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