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6)

북한 기독교계 정당 결성과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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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탄압에 대항 기독정당 잇단 창당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하에서 심각한 탄압과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취한 방식은 ‘무저항적 인내’였다.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했던 초기 교부들은 이러한 태도를 ‘파티엔티아(patientia)’라고 불렀다. 영어의 ‘인내(patience)’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했지만 이 단어가 라틴어 파티엔티아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칼 대신 펜을 선택했다. 그것이 기독교에 대한 ‘변증’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인내할 여유도, 펜을 선택을 상황도 되지 못했다. 북한의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라는 포악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정당의 힘으로 저항하고자 했으나 공산주의 앞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가 곧 드러났다.

기독교 정당 조직의 첫 경우가 1945년 9월 평안북도에서 기독교를 배경으로 조직된 ‘기독교사회민주당’이었다.

신의주제일교회 윤하영(尹河英·1889∼1956) 목사와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1902∼2000) 목사에 의해 주도된 이 정당은 한국 최초의 정당이었다. 본래는 ‘기독교민주당’이 정식 명칭이었는데 ‘북한 인민의 전적인 포섭을 위해’ 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고 불렸다. 민주적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정강으로 제시하였다.

‘사회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그것이 당시의 정치적 트렌드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경직에게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후에는 비기독교인들도 참여하게 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다. 정당의 조직과 함께 지역적으로 지부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북한 공산당은 이 정당의 와해를 시도했다. 한경직은 그해 10월 말 북한을 탈출하여 11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부 조직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사건이 11월 23일 발생한 신의주학생사건이었다. 11월 23일 용암포(龍岩浦)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 지부창립대회에 공장 직공들을 동원하여 습격했다. 장로 1인이 즉석에서 피살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분개한 신의주 기독학생들이 중심이 된 5000여명의 시위대는 공산당 본부를 습격했다. 공산당은 소련 군대와 비행기까지 동원,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80여명은 구속되었다. 당 간부들은 체포되었고, 정당은 곧 해체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또 하나의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조만식(曺晩植·1883-1950) 장로와 이윤영(李允榮·1890∼1975) 목사가 주도했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던 조만식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정당을 조직하고 반공노선을 분명히 하는 한편 신탁통치도 반대했다.

소련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로 민족의 스승으로 불리던 조만식은 1946년 1월 5일 체포돼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조선민주당 역시 공산당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제자들은 월남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던 조만식 장로는 6·25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당수였던 이윤영은 1946년 2월 월남했고, 1948년 5·10 총선거 때 서울 종로 갑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에서 임시의장 이승만의 요청으로 기도했던 이가 바로 이윤영 목사다.

1947년 11월에는 김화식(金化湜·1893∼1947)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하고자 했다.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민주당 결성이 준비되고 있을 때 평양에서는 기독교자유당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화식은 1945년 11월 초 정주 옥호동 약수(藥水)에서 몇 교회 지도자들과 자유당 정강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당 조직을 준비했다. 이것은 향후 이룩될 통일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화식 목사 외에도 김관주 우경천 황봉찬 등이 이 일에 관여하였고, 고환규(高漢奎) 장로는 당수로 내정되어 있었다. 결성식은 1947년 11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감지한 내무서는 결당식을 하루 앞둔 11월 18일 김화식 목사 등 4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해 투옥하였다. ‘기독교자유당’은 공식적으로 창당되지도 못한 채 와해되고 말았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개 정당이 공산당에 의해 탄압을 받고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정당을 시도한 것은 공산정권에 맞서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순연(純然)한 열정이었다. 체포된 교회 지도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순교자의 길을 갔고 일부 인사들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였다. 선택의 길은 분명했다. 공산주의에 순응하고 살든지 순교자의 길을 가거나 아니면 월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북한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월남의 길은 피할 수 없었다. 6·25 발발 이전까지 월남한 기독교인은 7만∼8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북한의 기독교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전체 월남 인구를 정확히 산정하기는 어렵지만 최대 150만명이 월남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다수가 기독교신자였다. 기독교반공주의는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학습된 것이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7.0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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