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7)

남한 정치 상황과 정부 수립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로 제헌국회 개원

해방과 함께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한 후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공산당은 기독교를 탄압하여 교회가 폐쇄되고 김화식 김인준 이정심 목사(이상 1947년), 김철훈 목사(1948년), 이유택 목사(1949년)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자의 길을 갔다.

1947년 말까지 80만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월남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공산정권의 학정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북한에서의 소련군보다 한 달 늦은 9월 7일 제24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튿날 서울에 입성한 이후 점차 남한 일대에 주둔하였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은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미·소 양군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 원치 않았던 38도선은 장차 한국민족의 분열과 비극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 하지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사이의 항복 조인이(9월 9일)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제는 미군이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남한에는 북한과 달리 정치적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여러 정당이 창당되는 등 정국이 혼란했다.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중심의 한국민주당, 안재홍 중심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등 50여개 정당이 난립했다. 이승만(1875∼1965)은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하여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1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지닌 김구와 한국독립당도 해방정국의 주요한 정치세력이었다. 표출하는 정파 간 이견과 대립으로 해방정국은 혼란했다. 국토의 분단, 경제구조의 파탄으로 경제적으로도 무질서했다. 북한에서 넘어온 월남 인구와 해방을 맞아 중국이나 일본에서 귀국한 인구가 200만이 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신탁통치 결정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모인 미국 영국 소련 외상들은 한국문제 해결책으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안은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전국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여 파업이 일기도 했다. 북한 공산당도 처음에는 반탁운동에 가담했으나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에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사항을 실천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3월 20일에는 정식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소련은 장차 세워질 임시정부를 위한 협의 대상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는 제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만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반탁운동은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점에서 반탁운동자라 하더라도 협의 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미·소 간 대립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946년 5월 9일). 1947년 5월 21일에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하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 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회부하자고 제안했다. 소련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한국독립 문제를 1947년 9월 유엔에 제출하였다. 미국은 유엔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하며 이런 모든 절차를 감시하며 협의하기 위해 유엔한국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 안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절대다수의 지지로 유엔에서 통과되었다. 이 결의에 따라 유엔한국위원회는 1948년 1월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의 활동을 거부하여 유엔한국위원단은 입북(入北) 할 수 없었고,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었다. 이렇게 되자 1948년 2월 26일 모인 유엔소총회에서는 유엔한국위원단장 인도대표 메논(V K Menon, 1897∼1974)이 제시한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남한에서 만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월요일에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5월 9일 주일에 실시하려 했으나 기독교회의 반대로 하루 미루게 된 것이다. 선거를 통해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였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국회를 개원하게 되었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등단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중략)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서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로 시작되는 기도로 개원되었다. 이 점은 국회속기록 제1호 1쪽에 기록되어 있다.

제헌국회는 즉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헌법은 7월 12일 국회를 통과하고 7월 17일 공포되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일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8월 15일 정부수립이 선포됨으로써 대한민국이 성립된 것이다. 그해 12월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의 승인을 얻어 한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가 되었다. 이것이 해방 후 한국교회가 헤쳐가야 할 환경이었다. 이런 사회·정치적 삶의 자리에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하며 교회 재건과 쇄신을 이루어 갔을까?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7.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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