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71)

 경남지방에서 교회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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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租-법통 노회… 광복후 장로교 첫 분열

경남에서의 교회 쇄신론자들과 친일 전력의 교권주의자들 간 대립은 1948년 12월 7일 마산문창교회 별관에서 개최된 제50회 경남노회에서 심화됐다. 노회는 논란 와중에 3일을 보내고 김만일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임했다. 김길창 목사 측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한대식 목사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는 신사참배는 물론 ‘미소기바라이’를 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미소기바라이는 신도(神道)의 정결의식으로 우리의 침례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회중은 숙연해졌다. 이때 김길창은 “미소기바라이가 무엇인가.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라고 했다. 그의 거짓됨을 보고 분노한 참석자들이 그를 제명하자는 데 동의했고 곧 재청이 이어졌다. 사태는 급격히 반전됐다. 불리해진 상황에서 김 목사는 자리를 떠났다. 노회장은 당사자가 현장에 없다는 이유로 가부를 묻지 않고 다음 회기 시까지 유보한다고 선언했다.

노회에서 제명 위기에 몰린 김길창은 기존의 경남노회를 이탈해 별도의 노회 조직을 만들려 했다. 49년 2월 9일자로 ‘발기인 대표 권남선’의 이름으로 별도의 경남노회 조직을 위한 소집통지서를 발송했다. “신앙신조가 맞는 신앙동지끼리 모여 열심 신주(信主)하여 전도사업에 진력함이 신앙양심에 꺼리지 않고 하나님과 혼란기에 있는 국민 앞에 기독교가 취할 명랑한 노선”이라고 하면서 노회 분리를 의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정대로 3월 8일 부산 항서교회에서 김길창을 비롯해 권남선 김영환 배성근 손순열 윤술용 지수왕 목사 등 10여명의 지지자들을 규합해 별도의 사조(私租) ‘경남노회’를 조직했다. 이를 51회 노회로 명명했다. 노회 조직과 함께 총회에 파송할 총대를 선출했다.

별도의 노회를 조직한 것은 자기 보위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것이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시작이었다. 그해 예정대로 마산 문창교회에서 본래의 경남노회 제51회 정기노회가 개최됐다. 이 노회에서도 총대를 선출했다. 이 노회는 후일 김길창 중심의 사조 노회와 구별된 법적 정통성을 지닌 노회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경남법통노회’라고 불렀다.

49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제3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됐다.

기존의 경남노회와 김길창의 사조 노회가 각각 총대를 파송했다. 총회는 경남법통노회 총대를 적법한 총대로 인정했으나 경남노회 분규건이 종결될 때까지 발언권을 보류했다. 그러나 총회는 불법으로 노회를 조직한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권위원 5인(김현정 김세열 김재석 서정태 구연직)을 선출해 경남노회 문제를 처리하게 했다. 전권위원회는 한부선 일파와 고려신학교와 관계하지 말라고 지적하고 경남노회 3분안을 제시했다. 즉 경남노회를 경남노회(부산지방), 경중노회(마산·통영지방), 경서노회(진주·거창지방)로 분할토록 결의한 것이다. 교회 쇄신론자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이에 대해 경남법통노회장 이약신 목사는 6월 13일자로 항의서를 발표하고 총회와 총회전권위원회의 결정에 반대했다. 당시 경남노회의 170여 교회 중 111개 교회가 전권위원회의 노회 3분안을 거부했다. 결국 전권위원회는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혼란만 가중시켰다. 이런 가운데 장로회 제36회 총회가 50년 4월 21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열렸다. 이 총회의 논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장로교신학교(박형룡)와 조선신학교(김재준) 측의 대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경남노회 분열과 총대권의 문제였다.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논란에 휩싸여 욕설과 폭력이 난무해 5일간 회무를 진행할 수 없었다. 경찰이 동원된 최초의 총회였다. 김양선은 이 총회를 “한국교회 70년 사상 처음 보는 대치욕적 사건”이라고 불렀다. 4월 25일 회집한 총회는 경남노회 문제에 대한 총회전권위원회의 보고를 기각하고 별위원(別委員) 7인(권세열 김광현 김상권 박용희 이대영 이인식 조승제)을 선정했다. 이들에게 경남지역 노회 문제 처리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총회는 더 이상 회의를 속개하지 못하고 정회했다. 이로부터 꼭 두 달 후 민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했다.

총회에서 선임된 별위원은 삼분오열된 경남노회를 모두 해산하고 제51회 경남노회(49년 3월) 이전으로 돌아가 새롭게 노회를 조직한다는 입장이었다. 경남노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김길창 측의 사조 노회로 유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아무런 조치 없이 기존의 경남법통노회를 배제하고 새로운 노회를 조직한다는 것은 부당한 조치였다. 항의가 뒤따랐으나 별위원회는 기존의 모든 조직을 무시하고 51년 3월 14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별도의 경남노회를 만들었다. 당시 경남지역의 교회는 178곳이었으나 이 회에 참석한 목사는 38명, 장로는 45명에 불과했다. 기존의 합법적인 노회를 부정하고 새 노회를 조직한 것은 경남법통노회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50년 4월 대구에서 정회했던 제36회 총회가 51년 5월 25일 피난지 부산중앙교회당에서 속개됐다. 총회는 입장권을 발부해 참석자를 제한했다. 경남법통노회 총대에게는 입장권을 발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별위원회의 보고가 채택되었고, 별위원회가 조직한 노회 총대들(권남선 김길창 김두선 김몽두 김석진 김응진)에게 총대권이 주어졌다.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이었던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에서 제거된 것이다.

김양선은 이렇게 썼다. “일선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정부와 교회가 임시 수도 부산에 피난 중에 있을 때에 총회의 주도권을 가진 수삼(數三)의 교권주의자들과 그 배후에서 암약하는 수삼 기회주의자들의 몰각(沒却)한 교권적 행동 때문에 출옥성도를 중심한 고려신학교 측이 제외된 경남노회가 승인되어 마침내 고려신학파는 총회의 문외로 쫓겨났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이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8.0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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