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교 원년를 통해 본 2012년

<기획특집> 장로교 총회 조직 100년을 기념하며

뉴스파워 강경구 기자  

서서평(徐舒平)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엘리제 쉐핑(徐舒平,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복음의 가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다간 그녀를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광주 양림동... 묘역 한 켠에 서있는 그녀의 묘지석... 올해로 그녀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지 77년, 조선이라는 땅으로 부르심을 받은지가 100년이 되었다. 1912년 32살의 나이로 조선땅을 밟은 서서평을 기다린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하여 2,500호, 약 10,000명의 사람이었고, 당시 광주권역의 교회는 태동의 역사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1926년에 가서야 4개 교회에 2,000여 성도가 있었다고 하니 실로 척박한 복음의 볼모지였고, 가난과 무지, 일본의 극악무도한 식민의 야망이 족쇄처럼 드리워져가는 도무지 희망이라곤 없을 것 같은 시대였다. 벗겨도 벗겨도 지울 수 없는 그 흑암의 땅 조선에 빛을 알리러 온 선교사들의 고뇌와 뜨거운 기도의 맥박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 싶다.

100년전 복음의 가치를 위해 싸운 사람들

1908년 4월 이기풍은 한국인 최초의 선교사로 제주도를 향했다. 쉐핑이 제주도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지는 1917년부터 1920년 사이다. 당시 미개척지인 추자도에 쉐핑은 남은 생애의 모든 힘을 쏟았다. 제주도를 순회하고 이어 추자도까지 들어가 확장주일학교 전담 선생을 파송한 것이 1922년이다. 1925년 8월에는 제주도 모슬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드디어 제주도의 수개처 교회에 부인(조력)회를 조직했다. 한국여전도회 원년은 1922년 12월 26일 광주에서 시작됐는데 그 여파를 몰아 제주도까지 여성의 참된 가치를 새롭게 모색하고 활로를 열어갈려고 했던 것이다. 1933년에 제주 모슬포에서 2주간 사경회 강사로 갈 때 동행한 스와인할트가 “그런 몸으로 어떻게 하려고 가는가?”라고 했듯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전도였다. 이기풍이 제주도를 나왔던 것이 1916년이고, 재차 입성한 것이 1927년이다. 성내교회 재임중이던 1930년 6월에 제주노회를 결성했고, 1회 노회장으로 최흥종 목사가 선출됐다.

최흥종과 이기풍, 그리고 서서평 복음을 가치로 여겼다.

쉐핑은 스프르라는 열대성 장기관병을 앓고 있었다. 클론병처럼 고질적인 장질환으로 좀처럼 회복되기 어려웠음을 감안할 때 그녀의 제주도행은 필사적인 각오가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1925년 8월 제주도 모슬포 교회에서 그녀의 불타는 선교열에 감동한 동료 선교사 스와인할트는 서서평의 삶은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었다. 목포에서 제주까지 목선으로 54시간을 타야했던 당시의 이동방법은 일등칸은 일본관리, 이등칸은 일본인, 결국 갑판에서 배가 항구에 닿을 때가지를 온갖 악취와 불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제주도에 1929년 최흥종 목사가 모슬포 교회로 왔고, 이기풍 목사는 성내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쉐핑이 1933년 병약한 몸으로 생애 마지막 2주간의 사경회를 인도하기까지 추자도 절반을 복음화 시키고도 하루에 150리, 200리 길을 걸으면서 제주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사활을 건 영적 현장에 건강을 추스르려고 이기풍 선교사와 최흥종 목사가 떠난 1931년 이후에도 제주도를 쉐핑은 54시간씩 갑판이나 삼등칸에 의지한 체 들어갔으며, 시도 때도 없이 아파오는 배를 더운 물주머니로 찜질하며 버텼다.

예장과 기장, 그리고 합동과 통합으로...

장로교 총회 조직 100년간 우리는 끝없는 확장?과 대책없는?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00년이라는 거대한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는 생각 할수록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다음 100년이라는 과제 앞에 서있는 지금 우리 교단의 모습과 장로회라는 조직에게 부여되는 책임과 의무감은 왠지 무겁고 버거울 정도다. 장로회 분열을 생각이나 했을까? 쉐핑은 1934년 6월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이기풍 선교사는 1942년 일본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다 순교하였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신학적인 성향 차이에 따른 분열로 평가 되고 있는 예장과 기장의 1953년 분열이후 6년만인 1959년엔 통합과 합동이 WCC(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 문제로 다시 한 번 분열하였다. 한국 교단의 큰 줄기인 통합과 합동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세계교회협의회(WCC) 제 10차 총회가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것을 두고도 교단간 설왕설래하고 있다. 1912년 9월 1일,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이래 장로교는 100년 동안 2백여개 교단으로 분열하였고, 2012년 9월 1일을 기점으로 다음 백년을 지금의 모습으로 맞이할 모양이다.

1시간 40분만의 뱃길...

육지에 도착한 쾌속선을 타고도 멀미와 어지러움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일행들을 보면서 편도 54시간을 뱃속에 몸을 맡기고 복음의 가치에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던 쉐핑과 제주도행 배가 난파하여 추운 겨울 추자도 부근 파도 속을 36시간 널빤지 하나에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던 이기풍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와 황금만능이라는 늪에 동력을 잃어버린 배를 타고 있지는 않는가? 가도 가도 미궁인 절망의 늪을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들어가는 가슴을 쥐고 한 웅큼의 눈물이라도 같이 흘릴 수 있는 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9월 1일, 하나뿐인 생명을 죽음으로 바꾸면서 복음의 시원을 열었던 신앙의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본질은 같으나 옷색깔이 다른 두꺼운 교단의 짐을 벗어버리고 우리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오붓하게 웃을 수 있는 단 하루라도 만들어보았으면... 그것이 통일을 위한 첫 단추가 아닐런지...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8.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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