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와 비텐베르그 부흥

1. 조악한 땅 비텐베르그


16세기 독일종교개혁은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역사상 기독교 출발 이후 이처럼 중요한 사건은 없었다.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는 독일이었고, 그 중심 무대는 비텐베르크였다. 당시 종교개혁의 본산지 비텐베르크는 작센의 엘베 강둑 메마르고 척박한 모래 많은 황폐한 지역에 위치했다. 이곳은 인구 3천의 가난하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주택은 낮고 낡고 작고 추했으며 게다가 나무로 만든 목조주택이었다. 심지어 선제후가 머무는 성마저도 조악하고 볼품없었다. 땅의 소출마저 부실했다. 루터의 동료 멜란히톤은 비텐베르그에서 먹은 음식이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비텐베르그 옛 시내의 모습

이곳은 문화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어 문화와 예절과 친절이 부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터는 그 마을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비텐베르그에 대학을 세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마치 작고 초라한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탄생한 것처럼 이 보잘것없는 마을에서 인류 역사의 분기점, 종교개혁이 태동되었다.


2. 루터의 영적각성 배경


마틴 루터
종교개혁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진보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영적 부흥이었다. 이 부흥의 불길을 당긴 사람은 작센의 한 농부의 아들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그는 1483년 11월 10일 밤 11시 독일 작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나 1546년 2월 18일 태어난 바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모는 하급 신분의 교육받지 못한 계층 출신으로 무척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이었다. 루터는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8세에 독일의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는 영광을 얻었고, 이 대학에 재학하던 20살 때 이곳에서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접할 수 있었다. 그 후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이 들려 있었다. 1502년 문학사를 마치고, 1505년에 에르프르트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부친의 소원에 따라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법학을 시작한지 채 2달도 되지 않아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기도, 금식, 밤샘, 그리고 스스로를 자학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던 루터는 요하네스 폰 스타우피츠를 만나면서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그를 통해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배워가며 자신의 죄에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의 공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루터의 경건은 율법적 중세 카톨릭 경건으로부터 복음적 프로테스탄트 경건으로 전환되었다.


3. 영적각성과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

  

성경연구와 고전연구는 루터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주었다.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10년 전 작센에 설립된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신학부를 책임 맡은 루터의 정신적 스승 슈타우피츠가 그를 신학부 교수로 끌어들인 것이다.

 

비텐베르그 대학

루터는 여전히 수도원에 머물면서 수도사로, 설교가로, 교수로 3가지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곳에서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1516-1517), 그리고 히브리서(1517-1518)를 강의하면서 루터는 성경적 기독교를 재발견했다.


성경연구는 루터의 눈을 새롭게 열어주었다.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그의 눈에 진리의 서광이 비추이더니 그의 가슴이 성령으로 불타올랐다. 성경연구를 통해 진정한 회개, 죄와 은총, 문자와 영, 율법과 복음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가슴과 양심에 호소하는 그의 신학은 스콜라주의 앙상한 뼈만 남은 신학과 달랐다. 강한 확신과 인격적 회심을 생명력 있게 만들었다.


그 모든 영성의 원천은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재발견한 성경의 진리였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복음은 새로운 계시였고, 성경 전체를 다시 이해하는 놀라운 빛이었다. 죄의 짐에 눌려 어두운 나날을 보내던 루터 앞에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신칭의 교리는 루터에게 죽는 순간까지 복음의 총체이자 실체였으며, 신학의 진수였고 기독교의 핵심 진리였다.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은 루터의 사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를 개혁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3. 루터의 회심과 비텐베르그 개혁


성경의 은총론을 파괴하는 면죄부 판매로 고민하기 시작한 루터는 긴 고민과 숙고 끝에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저항할 수 없는 신앙양심에 따라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1517년 10월 31일 12시 루터는 면죄부 판매 오용에 대한 부당성을 포함한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라틴어로 게재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논조를 내걸 때 누구도 이 사건이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되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라틴어 95개조(바젤에서 인쇄)
라틴어 95개조 논제는 “면죄부의 공덕을 설명하기 위한 토론”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논의를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복사되고 번역되고 마치 천사의 날개를 빌린 것처럼” 불과 14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몇 주 만에 독일과 유럽 전역을 접수했다. 진리의 깃발이 독일과 유럽 전역에 휘날리면서 제임스 번즈가 말한 “복음주의 기독교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거룩한 빛을 향해 달려갔다. 유럽 전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역사, 종교개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루터는 원하던 원치 않던 개혁의 선봉에 섰다.


4. 놀라운 확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은 믿음과 행위에 의하여, 은총과 인간의 공로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이전의 가르침과 달랐다.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권위라는 가르침은 전통을 성경 권위 위에 두는 이전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카톨릭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민중의 손에 들려주었다.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민중의 손에 들려지자 사람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각성하기 시작했다. 민중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었고, 거룩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성경이 출간 된지 불과 수년만에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라틴 벌게이트(Vulgate) 성경을 읽었던 사제들보다 더 많은 수의 평신도 독자들을 갖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전 15세기 동안 필사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성경이 단 일년 안에 독일과 유럽 전역에 유포되었다. 종교개혁으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전통의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셔서 생명과 능력의 말씀을 다시 선포하셨다.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으로 마르틴 루터는 사도 바울 이후 누구도 갖지 못했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루터의 가르침은 비텐베르그 대학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진리가 그들의 가슴에 심겨지자 그 영향력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협 앞에서도 진리의 나팔수가 되어 루터의 사상을 확산시켜 나갔다. 동료 교수들도 루터의 개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의 봉화는 작은 시골 마을 비텐베르크에서 독일어권 전역으로, 다시 전 유럽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놀랍게 확산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성경적 교리의 재발견을 통해 근대 부흥의 길을 닦아 놓았다. 루터 개인의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과 영적각성이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를 창출했고, 교리적 재발견은 영적각성의 위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루터의 개혁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그가 외친 칭의론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확실히 루터는 근대영적각성의 선구자였고, 종교개혁은 이 땅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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