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과 제네바 부흥


루터에 의해 비텐베르그에서 한창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던 1536년 7월 말 27살의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했다. 칼뱅이 처음 도착했을 때 제네바는 주민이 불과 1만 2천명 가량이었지만 척박한 비텐베르그에 비해 많은 이점을 소유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접경에 위치했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압제에서 최근에 벗어났으며, 공화제적 자치 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무엇보다도 제네바 시민들이 종교적인 가르침에 목말라 있었다. 한 마디로 칼뱅이 도착했을 때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길 수 있는 외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베드로 교회에서 바라본 오늘날 제네바 시내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타락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제네바에 도착한 칼뱅은 레만 호숫가에 있는 이 도시에서 “비틀거리는 공화정, 흔들리는 믿음, 미성숙한 교회”를 목도했다. 제네바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서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하고 가면무도회와 술마시며 떠들기를 좋아하였다. 분별없는 도박, 술취함, 간음, 신성모독, 온갖 종류의 악으로 가득찼다. 매매춘이 국가에 의해 용인되었고 포주장이라 불리는 여자에 의해 감독되었다. 사람들은 무지하였다. 사제들은 그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에게 나쁜 본보기가 되었다.


성 베드로 교회

1536년 9월 5일 오후 칼빈은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다. 바울서신과 신약성경 강해는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칼뱅은 제네바 개혁과 부흥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불태웠다. 필립 샤프의 말을 빌린다면 칼뱅은 제네바를 위해, 제네바는 칼빈을 위해 미리 운명지어져 있었고, 칼빈과 제네바는 그들의 소명과 선택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존 칼빈이다. 그는 가장 심오한 주석가, 가장 위대한 조직신학자, 그리고 종교개혁이 낳은 가장 심오한 기독교 사상가였다. 그의 가르침은 성경중심이었고, 그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의 전 생애는 한 마디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로 집약할 수 있다.


존 칼빈
종교개혁의 사상을 그처럼 명료하고 힘 있게 통합시킨 인물도 드물다. 이미 20대에 에라스무스와 더불어 유럽의 두 지성이라고 불리었던 존 칼빈은 단순히 종교개혁자로서만 아니라 제네바 개혁과 부흥을 통해 유럽의 영적 지도를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칼빈에 와서 비로소 종교개혁의 이상과 신학이 하나의 체계로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권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윌리엄 캐리와 같은 개척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리차드 백스터, 존 번연, 조지 휘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그리고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부흥목회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갑작스런 칼빈의 회심은 일생동안 그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제로서, 인문주의자로서, 법학자로서 꿈을 키워가던 칼빈은 1532년과 1534년 사이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다. 시편주석서문에서 언급했던 칼빈의 갑작스런 회심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회심에 견줄 수는 없지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오만 편견 그리고 고집쟁이였던 젊은 칼빈은 이후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갑작스런 회심으로 심령이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셨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다. 칼빈은 회심 이후 성경을 하나의 텍스트가 아닌 유일한 텍스트(the Text)로 삼고, 오직 말씀 연구에 전념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의 회심은 그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제네바 개혁과 부흥을 이해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칼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기독교 강요>는 그의 영적각성의 결정체였다. 비록 <기독교 강요>가 1536년에 출간되었지만 이미 1535년에 책이 완성된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회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책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종교개혁의 아버지라고 평가받는 루터의 작품 속에 오랫동안 카톨릭의 잔재가 남아 있었지만 칼빈은 오직성경(Sola Scriptura), 오직믿음(Sola Fide), 오직 영광(Sola Gratia)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의 세 가지 원리를 완벽하게 자신의 작품 속에 용해시켰다.


1538년부터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오기까지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그 생활은 칼빈의 신학과 개혁을 다듬어주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라스부르그 없는 칼빈은 존재할 수 없다. 칼빈은 이 기간 불란서의 망명객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면서 목회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우며 진정한 개혁자, 교회를 위한 신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의 로마서 주석은 이곳에서 행한 설교의 결정체였다.


1539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기독교 강요> 2판이 출간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학자들은 칼빈이 신학적 틀을 이때 구현했다고 평가한다. 그곳에서 칼빈은 부처로부터 예배 모범을 배우고, 부처의 권징을 제네바에 도입했다. 또한 근대교육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존 스트롬의 영향을 받아 장차 기독교 교육의 이상을 제네바에 구현하려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을 통해 구현되었다.


칼뱅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3년간의 유배 생활을 청산하고 제네바로 돌아왔다. 칼뱅에게 제네바는 거룩한 부르심만 아니라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이보다 더 두려워하는 곳은 없다. 내가 이 도시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이 도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뱅은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 칼뱅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의무감이 나를 압도하여 결국 나는 강탈당했던 내 양 떼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슬픔, 눈물, 그리고 커다란 근심과 불안 속에서 이러한 결단을 하였다.” 


칼빈이 돌아와 제일 먼저 단행한 것은 예배개혁이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유럽과 영미 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꾼 제네바 부흥은 예배개혁에서 출발했다. 칼빈은 라틴어 형식의 보는 예배(visible worship)에서 말씀 선포가 중심이 된 듣는 예배로 전환했다. 당시 예배가 라틴어로 드려져 성도들은 설교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며, 그저 예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칼빈은 라틴어 예배에서 불어 예배로  예배를 개혁했다. 이것은 단순히 보는 예배에서 들리는 예배로의 전환을, 성직자 중심에서 회중 중심으로, 일방적 예배에서 함께 드리는 공동체적 예배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또한 성례가 하나의 예전적인 의미로 시행되어 감격과 감동이 결여된 성례에서 말씀과 성령의 영적 임재가 동반된 예전을 정립했다.


칼빈의 제네바 부흥의 분명한 원동력은 말씀 중심의 개혁이었다. 제네바의 개혁은 말씀의 바른 선포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은 제네바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칼빈은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영적각성의 역사에 칼빈이 남긴 가장 큰 공헌은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밝힌 일이다.


그는 ‘성령이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는 신학적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했다. 성령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자 제네바 공동체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이 일어났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 참된 영적각성이 일어났다. 조나단 에드워즈, 하월 해리스, 조지 휘필드, 찰스 스펄전, 로이드 존스를 비롯하여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영적각성이 강하게 일어난 이유도 거기 있다.

 

제네바 아카데미
칼빈의 제네바 부흥의 또 다른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였다. 예배개혁이 제네바 부흥의 원동력이었다면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부흥의 결정판이었다.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는 가장 경건한 훈련이 구현된 곳이었다. 성경암송과 새벽기도가 필수였고, 늘 바른 신앙훈련이 삶 속에 용해되었다. 1559년 이후 기독교 대학으로 장식된 제네바 자체는 수천명의 학생들과 난민들에게 하나의 피난처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개혁자 존 낙스가 예찬한 것처럼 제네바 학교는 사도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 학교였다. 사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혁주의 신학의 모판이었고, 근대교육을 기독교 방향에서 구현한 구체적 모범이었으며, 에딘버러대학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의 모델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네바 부흥은 강력한 사회개혁을 수반한 부흥이었다. 이 같은 칼빈의 이상은 인류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네바 개혁은 훗날 소위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부흥과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제네바 개혁은 제네바에서 놀라운 국가적 회개운동이 발흥하고,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정립하여 후대 말씀을 통한 부흥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근대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말씀이 선포되자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신자들의 심령과 공동체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셨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신앙과 사상을 따르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제네바 개혁과 부흥은 제네바 지역을 넘어 영국, 스코틀랜드, 불란서, 저 개발국가들, 그리고 그밖에 지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스코틀랜드 청교도 공동체, 화란개혁주의 공동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미국의 청교도 공동체 가운데 놀라운 영적각성이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낙스의 개혁과 부흥은 존 칼빈의 제네바 부흥의 결과였다. 칼빈의 제네바 부흥, 청교도 운동과 화란개혁파 경건주의 부흥이 보여주듯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놀라운 영적각성이 일어났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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