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전야

4.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
오늘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불과 1년 앞두고 있습니다. 한국교계에 중세 말엽의 타락과 윤리실종이 만연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에 비추어 보며 교계에 만연된 잘못된 종교적 관행과 전통 그리고 왜곡된 가르침을 개혁해 나가는 귀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한국교회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해줍니다.

첫째, 오늘날 한국교회는 타락과 부패가 만연한 종교개혁 전야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온 국민은 최근 최태민, 최순실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분노하고 있습니다. 분노한 백만인 넘는 국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종교계, 그 중에서도 기독교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해 자정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영적세계 속에서 우리 모두 길을 잃은 혼돈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사탄의 영이 정치, 문화, 종교 전체를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성적 타락이 중세 전야와 다를 바 없고, 돈과 명예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전혀 죄의식 없이 부정과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금권의 타락으로 인해 돈이면 이단이 정통이 되고 정통이 이단이 되는 혼돈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단과 교파에서 교단장 선거에 금권이 오가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 가운데 교회 직분 임직 때 돈 거래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교단과 노회와 개 교회에 각종 현안마다 이권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기독교는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해야 할 신학교에서 교수직마저 돈으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며 돈이면 무엇이나 되는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너무도 깊이 만연했습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과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자행되고 있고, 부교역자끼리 같은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교인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 부끄러운 죄악들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최근 현직 모 신학대학교 총장의 금품 비위 문제는 비단 그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국 신학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종교개혁 전야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개혁 전야만큼 종교적인 시대가 없었으면서도 그 때만큼 교회와 사회가 타락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시대도 없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냉정하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필자 역시 한국의 영적혼돈과 부패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오늘의 우리 정치와 사회 현실 앞에 돌을 던지기보다 저를 포함해 기독교 지도자들은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둘째, 이런 우리의 현실 속에 한국교회는 다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터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정확한 표준이라는 사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칭의론, 그리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통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원리를 깊이 깨닫고 가르치고 전했고 실천했습니다. 중세의 타락을 일소한 것은 바른 성경적 가르침의 진정한 회복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근본 신앙원리,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온전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재발견하고 루터가 재발견한 이 복음의 능력을 한국교회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1522년부터 1524년까지 불과 2-3년 동안에 개혁의 틀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포문으로 내걸었던 1517년 10월 31일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루터는 불과 7년 만에 개혁의 신학적 틀을 다졌습니다. 처음부터 루터의 개혁사상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포문을 연 후에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성경을 통해 나갈 길을 제시했고 루터는 점점 더 성경적인 종교개혁의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시대가 루터를 만들었고 루터가 시대를 만들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가 완전하기 때문에 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성경을 통해 옳다고 믿었던바, 개혁 사상을 흔들리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교리적 개혁 없이는 진정한 삶의 개혁이 요원합니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도 교회의 근본적 교리들을 검토하는 작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터가 시대의 부패를 보면서 말씀 속에서 답을 얻기 위해 몸부림 친 것처럼 한국교회 역시 복음으로 돌아가 과연 성경이 이 시대에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깊이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한 그 복음,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심어준 그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 근본정신을 계승하고 기독교 근본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종교개혁의 근본정신, 곧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이 신앙과 삶의 표준이라는 사실을 한국교회가 깊이 인식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개혁 시대 개혁자들이 성경을 통해 개혁의 길을 찾았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성경적 교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지난 50년이 넘게 한국교회는 수많은 새로운 신학사조가 등장했었습니다. 성의신학, 문화신학, 토착화신학, 민중신학, 과정신학, 해방신학은 그 중의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들 신학이 토론의 장, 논의의 장을 제공했지만 이 중 어느 하나도 한국교회의 대안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근거해야 할 신학이 성경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현대인들의 사상의 변천을 반영해야 하지만 성경의 근본진리와 그 근본진리에 근거한 기독교의 근본 사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그토록 영향력을 미치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재발견한 복음, 루터가 재발견한 복음, 곧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힘이 없는지를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침체하고 있고 혼탁하고 금권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문제는 한국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한다면 개인과 교회와 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능력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면 이단들이 득세하지 못할 것이고 교인들이 잘못된 이단에 빠져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신학교 역시 신학교육이 바른 성경진리를 깨우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한국에 신천지에 빠진 목회자만 2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신학교에서 바르게 가르쳤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신학자로 깊은 책임의식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이단에 빠진다면 하물며 성도들이 어떻겠습니까? 너무 과장이라고 혹평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볼 때 한국교회는 교단의 지도자들,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 모두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목회자도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뼈를 깎는 각오와 결단과 깊은 자기반성이 지금처럼 요청되는 시대는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적 기독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 신학교육이 현장과 동떨어진 신학교육이 아니라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고 교회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위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왜 교회가 부패했는지 어떻게 교회가 회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영적 양적 침체, 심각한 분열, 반기독교정서, 이단의 발흥, 세속화 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오늘날 신학교와 신학교수들은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신학은 무늬만의 기독교, 사이비라는 사실을 종교개혁은 교훈해줍니다.

사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강하게 열기까지 루터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해야 했고, 파문을 각오해야 했고, 온갖 생명의 위협과 박해와 수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위한 싸움을 기꺼이 각오한 것입니다. 그는 그 일에 올인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루터에게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자신의 보신과 사익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521년 보름스 회의 참석이 보여주듯 루터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이 믿는 바를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는 인세를 받지 않고 종교개혁의 정신이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널리 확산되어 나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만약 루터가 책 판권을 주장했다면 그는 대단한 부를 누렸을 것이지만 그의 개혁 사상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종교개혁운동도 미완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익을 챙기기보다 당시 로마교회 전체의 부패를 보면서 교회 전체의 개혁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개혁을 위해 그는 대가를 지불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는 교회를 세우는 진정한 성경적 개혁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일을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으로 받아들였고, 그 일을 진행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신학을 이제 중단해야 합니다. 무늬만의 기독교를 만드는 일을 지양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외치면서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를 그냥 값싸게 팔아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이 온 몸으로 실천하고 온갖 위협과 생명을 무릅쓰고 실천했던 그 개혁정신을 먼저 각자 깊이 깨닫고 실천하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온 성도들이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온전히 회복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했고, 자신들이 믿는 바 그 신앙을 담대히 강단에서 외쳤고, 또 자신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기도하며 전한 종교개혁자들의 메시지는 청중들의 심령에 깊숙이 파고들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 가운데 변화가 공동체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목회자들은 말로만의 복음을 그만 외쳐야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복음은 아무런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의 복음을 강단에서 외쳐야 하고 그대로 살아야 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칼빈주의이든 웨슬리신앙이든 역사적 기독교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가를 지불하는 신학을 온전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도 많은 약점이과 있었지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전도했습니다. 말의 전도만 아니라 삶의 전도도 매우 중시한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대로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행동으로 전도”(preaching by deeds)했습니다. 이들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여러 차례 한반도 전역을 돌며 순회전도를 최선을 다해 실천하면서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코레라가 만연했을 때 그 속에 뛰어들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복음의 대 사회적 민족적 책임을 온전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자신이 믿는대로 실천하고 살았습니다. 그에게 교리와 신앙, 교리와 실천, 신앙과 삶은 괴리되지 않았습니다. 칼빈에게도 칭의는 성화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는 교리이자 삶의 체계입니다. 코람데오는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을 말합니다. 주지하듯이 요한 웨슬리의 신학사상의 근간도 성화이며, 한국성결교가 성결을 그 생명을 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칭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개인의 신앙이 삶의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론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는 자들이 믿는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성화를 가르치고 강조하고 실천하도록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만 구원 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감격 속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성화의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 위임을 명하시면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법정적 칭의에 머물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가 함께 가지 못한 한국교회를 보면서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회는 구원파를 비판하면서 구원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구원 받는 자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은 개인구원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서로가 피 튀기는 교리적 논쟁을 했지만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이상 앞에 개인의 유익보다 전체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가장 우선했습니다. 개신교 신앙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힘을 합쳐 고군분투하며 개신교의 자유를 얻어냈고, 그런 개신교 이상을 사회와 국가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갔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잘못된 신앙에 맞서 성경적 가르침, 성경이 신앙와 행위의 절대적 표준이 된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실천하고 개인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구현해 나갔습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복음의 순수성을 견지했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으며, 그러면서도 복음의 대 사회적 민족적 책 임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런에 요즘 한국교회 안에는 보수주의 교회들이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회적 책임도 약하고 신앙과 삶이 괴리되고 돈의 유혹에 약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금권을 앞세운 이단의 세력 앞에 보수주의자들이 힘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보수적인 교회와 기성교회가 이단 확산의 채널이 되었습니다. 통일교의 성화신학교가 선문대학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예수교감리교회에서 재정난으로 건축하던 그 학교를 넘겨주었기 때문이고, 박태선이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것도 집회 헌금을 대한신학교 건축헌금을 위해 바치겠다는 말에 미혹되어 김치선 목사와 대한신학교가 무대를 펼쳐주었기 때문이고, 나운몽이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뒤에서 배경을 제공해준 것이 수표감리교회였으며, 그리고 류광수 다락방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고신과 합동의 목회자들이 두둔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회자들이 좀 더 냉정하고 주의 깊게 처신했다면 그렇게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한기총의 무분별한 이단해제도 이단의 범람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한국교회는 깊은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성경을 떠나버렸고 보수주의자들은 개혁주의와 정통신학을 구호로 외칠 뿐 사회개혁과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 깊이 자성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연합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만 높임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특정 교파를 만드는 것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칼빈은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일치를 그러나 비본질 문제는 관용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종교개혁의 연합정신을 계승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입국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서로 교파가 달랐고 출신대학과 신학교가 달랐지만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성경번역, 문서선교, 학교운영, 주일학교운영, 복음전파와 순회전도에 이르기까지 협력과 연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로교를 대표하는 언더우드와 감리교를 대표하는 아펜젤러의 연합은 곧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함께 나란히 제물포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언더우드와 함께 혼신을 다해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하고 1890년 예수셩교서회를 조직하여 성경번역과 문서 선교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만큼 연합운동에 앞장선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함께 한반도 전역을 순회선교하며 한국민족의 복음화에 전념하다 마지막에 자신의 생명마저 바친 아펜젤러야 말로 연합운동의 진정한 롤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로교 초대 총회장을 지냈던 언더우드 역시 연합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는 그의 연합정신과 관련하여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는 결코 종파적이거나 계급적이거나 인종적인 편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가 모든 인종 민족 계급 연령 종파에 속한 사람들과 진정한 형제애를 나누는 모습을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의 존재의 모든 흐름은 연합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살아 있는 영혼에게 도움과 사랑을 베푸는 친밀한 교제를 이루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동정과 관심과 사랑 앞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도량의 넓고 좁음이나 피부색이 희고 검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언더우드는 네덜란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 출신이면서도 미국 장로교(PCUSA) 선교사로 파송받아 다양한 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진행할 수 있도록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장로선교회(PCUS)가 한국에 들어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도 언더우드였고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진행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놓은 사람도 언더우드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칼빈의 연합정신과 초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보여주었던 연합정신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과거 종교개혁의 정신과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개혁안을 만들고 회의를 한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세 말엽만큼이나 회의가 많이 열렸던 시대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런데도 개혁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무언가 구상을 하고 조직을 만들고 구호를 외친다고 개혁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 5백주년의 참된 의미는 종교개혁 500주년의 기념이 아니라 그 정신의 계승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참된 개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은 한국교회가 다시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 의 놀라운 은혜를 힘입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칼빈이 사도행전 2장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을 주석하면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에 실추되었던 교회의 명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새로워지는 일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순절성령강림은 물론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운동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 모두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이들도 바로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 기자명 박용규
  • 입력 2016.12.01 11:53
  • 수정 2020.12.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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