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신학지남 제81권 제2집 (2014.6): 161-193

최봉석 목사의 한국교회사적 평가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신학지남 제81권 제2집 (2014.6): 161-193
 
 
목차
들어가면서
1. 신앙여정과 평신에서의 신학교육
2. 간도 선교의 개척자, 한국교회의 영원한 전도인
3. 평안북도 산간 오지를 가슴에 품은 불타는 전도자
4. 능력과 이적의 종, 최봉석
5. 신사참배반대운동의 또 한 명의 주역
맺는 말
 
들어가면서
한 인물이 하나님과 역사 앞에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가 그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해도 가족들이 딸렸기 때문에 함부로 자기 의지대로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 세상사다. 어디 가족들뿐이랴. 수많은 이권과 권익 앞에 타협의 길을 걷는 것이 인생길인지 모른다. 역사 앞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들에게도 인간적 치부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해온 인물들이 있었다. 때문에 역사는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아마도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는 그런 류의 인물 중 한명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거론되었던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복음을 압축한 선명한 기치 아래 그는 잠자는 한국교회를 깨웠고, 실제로 남만(南蠻) 서간도에 가서 수많은 불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 많은 교회를 세웠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는 평북 산간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며 여러 교회를 설립했으며, 마지막에는 거대한 신사참배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가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다. 그는 어쩌면 한국교회에 신화같은 존재이면서도 역사 앞에 제대로, 아니 가장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인 듯하다.
한국교회사가들은 최봉석에 대해 너무도 인색했다. 초창기는 물론이고 현대 한국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기술한 한국교회사 관련 저술에 그의 세 글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송길섭 교수가 저술한 『한국신학사상사』에는 최봉석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1 감리교 소속 신학자요, 또 책의 성격상 신학 흐름을 다룬 책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가들도 다루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장로교 신학자가 아닌 타 교파 소속 신학대학교 교수들의 저술은 물론이고 장로교 소속 교수들이 저술한 책에도 최봉석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니 그의 이름과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최봉석을 연구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사료의 부족이다. 걸출한 인물, 한국교회 신화처럼 여겨진 사람이지만 실제로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2 최봉석 자신이 직접 남긴 논고나 저술은 없고, 몇 편의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기록한 것들도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논고들이라기보다 편린들에 불과하다. 최봉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31년 신학지남에 “전도자 최봉석 목사 편언”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신학지남』 여느 한 기자가 쓴 2쪽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글이 당시 최봉석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2년 후 1933년에 김인서가 자신이 발행하는 신앙생활에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이라는 이름으로 4쪽에 걸쳐 쓴 글에 그의 가정 배경과 사역의 성격이 비교적 잘 드러나고 있다. 김인서의 글은 『신학지남』의 내용과 논조를 좀 더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봉석이 아직 살아 있을 때 기록한 이 두 글은 짧은 단편이지만 최봉석의 복음전도 사역에 대한 그의 헌신과 결실을 잘 정리해 주었다. 시기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있기 전이라 앞서 두 편의 글에는 최봉석의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해방 후에 안용준이 1956년 파수꾼에 쓴 “권능(權能)의 전도자(傳道者) 최봉석 목사”는 해방 전 기록된 두편의 글과 그동안 최봉석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일화들을 정리한 것이다. 문헌에 의한 연구작업은 아니지만 앞서 기록된 두 편의 글에서 밝히지 않은 내용, 무엇보다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지 『교회와 신학』에 실린 이영헌의 “최권능 목사전”과 1980년 『기독교대백과사전』에 수록된 “최봉석”은 앞서 발표된 논고들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그가 차지하는 위치, 그가 보여주었던 주님에 대한 놀라운 희생과 헌신에 비하면 한국 신학계의 그의 대한 평가는 너무도 초라했다. 아니 거의 무시를 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서 필자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본고는 자기 반성차원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시도한 것이다. 과연 한국교회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그는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했는가? 그에 대한 한국교회사적 위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되 필자를 포함 교회사가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의미가 있음을 밝힌다.
 
1. 신앙여정과 평신에서의 신학교육
『기독교대백과사전』은 최봉석을 “장로교 목사, 전도인, 순교자”로 지칭했다.3 그는 최권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33년 김인서가 “칠십교회의 아바지 최봉석”에서 “조선에서 최권능이라면 아는 이가 만치만 최봉석이라면 알 사람이 만치아니하다”고 한 것으로 보면 그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최권능으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최봉석(1869-1944)은 1869년 1월 7일 최준서와 모친 김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평양 장경문내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그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인서의 기록에 의하면 최봉석의 부친은 평양의 강동현 미곡창장으로 재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7세(歲)ᄭᅡ지 한학(漢學)을 수(修)하고 감영통인(監營通引)으로 정배(定配)사리 금광별장(別將)으로 포수도령장(砲手都令將) 등(等)”4을 역임했으며, 평양감사 밑에서 감찰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통인은 감찰사의 비서를 지칭하는 것이다. 1885년 17세 때 공직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25세까지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방탕한 생활”이었다. 게다가 공직을 수행하던 중 공금을 횡령하여 국고를 손실시킨 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때 의사였던 삭주교회 백유계(白留溪) 영수로부터 “예수 믿고 회개하여 새사람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깊이 고민하다 주님을 만났다.5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은 26세 때였다.
이 후 최봉석은 감리교의 영향력 있는 노블(W. A. Noble 1866-1945, 魯普乙)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노블 선교사는 와이오밍신학교와 감리교 명문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와이오밍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10월 17일 선교사로 내한해 경이적인 족적을 남긴 감리교 선교사였다. 3년간 배재학당 교사를 지냈고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청일전쟁 중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다 병사한 제임스 홀(W. J. Hall) 선교사 뒤를 이어 15년 동안 평양과 서울 지방 감리사로 한국감리교 70%를 관할했던 감리교 선교사였다.6 최봉석이 그렇게 영향력 있는 노블 선교사를 만난 것은 특별한 은혜였다. 당시 감리교는 웨슬리의 뜨거운 열정을 이어 받은 아펜젤러의 영향으로 신학적으로 매우 건전했으며 장로교와 보조를 맞추며 한국선교를 효율적으로 전개하던 시기였다.
세례를 받을 때 최봉석은 특별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의 사람이 되었다. 세례를 받던 그해 “불덩이가 가슴에 떨어지는 꿈을 꾼 뒤부터 전도의 열심이 솟구쳐 이후 평생을 전도하는데 헌신하였다.”7 그는 세례를 받은 후 평양뿐 아니라 삭주까지 내려가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이 때 감리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가 자연스럽게 장로교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2년 후인 1905년에 삭주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그 후 양전백의 천거로 매서인으로 활동하면서 벽동 강계 위원 초산 자성 창성 압록강 건너 통화현까지 다니며 전도했다. 집사로, 권서인으로 그의 열심과 헌신을 인정받아 1906년에는 삭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던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와 동시에 벽동읍교회에 조사로 부임하였다. 벽동은 박형룡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1907년 38세의 나이로 벽동교회 조사로 부임한 최봉석은 타협하지 않는 복음 그대로의 목회를 실천했다. 차재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상권에는 다음과 같이 벽동교회와 최봉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벽동군읍교회(碧潼郡邑敎會)가 성립(成立)하다 선시(先是)에 본읍인(本邑人) 김서면(金西緬), 김태윤(金泰允), 안태흠(安泰欽)이 시신(始信)하고 교동(校洞) 김응주(金應周) 사제(私第)에 회집(會集)하니 당시(當時) 불신자(不信者) 등(等)이 박해(迫害)하야 회집(會集)을 부득(不得)게 하난지라 산림급강(山林及江) 안(岸)에 은피예배(隱避禮拜)이러니 기후(其後)에 정의준(鄭義俊), 임봉서(林鳳瑞) 부부(夫婦)가 병신(.信)하야 정저(鄭邸)에셔 예배(禮拜)할 새 선교사(宣敎師) 계인수(桂仁秀)와 조사(助師) 한득롱(韓得隴)이 유시래순(有時來巡)하엿고 기후(其後)에 최봉석(崔鳳奭)이 조사(助師)로 피임(被任)하야 본읍(本邑)에 래주(來住)하야 열심전도(熱心傳道)할새 이적(異蹟)이 수현(隨現)이라 당시(當時)에 본군(本郡) 박린옥(朴獜玉)이 역신자(亦信者)로 교회(敎會)를 협찬(協贊)하니 수년간(數年間)에 교회대진(敎會大振)이라 어시(於是)에 전교회(全敎會) 합력(合力)하야 일좌거옥(一座巨屋)을 매수(買收)하야 예배당(禮拜堂)으로 사용(使用)하고 교회(敎會)를 확립(確立)하엿스니 당시(當時) 선교사(宣敎師)난 노세영(盧世永)이요 조사(助師)난 최봉석(崔鳳奭)이러라.8
 
이미 성령의 권능을 받은 최봉석을 통해 이적이 일어나고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고 예배당을 매입하는 등 벽동읍교회가 영적으로 질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그는 믿는 성도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교인들의 담뱃대를 모아 꺾어버리고, 첩이 있으면 원입을 금지시켰으며 주일성수를 실천하지 못하면 세례를 주지 않았으며, 한 달 결석하면 책벌했다. 우상제물을 엄금하는 등 엄격하게 성경대로의 교회 정치를 실천했다.
당시 벽동읍교회를 맡아 지도하고 있던 선교사는 시릴 로스(Cyril Ross 1868-1963, 盧世永)이었다. 로스는 1897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에서 전도활동을 하다 1899년에 의료 선교사 어빈과 함께 경남 함안에 이영리 교회를 설립하였고 다시 1901년에는 부산의 영주동교회를 설립했으며 구마산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가 평북 선천으로 사역지를 옮긴 것은 1902년 11월 25일이었다. 로스는 남자성경학교 교장으로 신성학교를 설립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으며 1903년에는 강계지방을 순회전도하였고 1904년에는 샤록스 선교사와 강계지방을 순회하며 선교했다.9 1912년 총회 조직 때는 초대 평북노회장에 선출될 정도로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로스는 마포삼열(Samule A. Moffett), 이길함(Graham Lee), 스왈른 (William Swallen)이 졸업한 미국 매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출신이었다.10 이 학교 출신들이 평양지역에 포진해 있으며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귀한 도구로 쓰임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로스는 상당히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고 부흥을 지향하면서도 매우 지적이었다. 그가 1912년 성서개역위원회으로 성경개역 작업에 참여한 것에서도 알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봉석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영성과 지성의 균형을 갖춘 인물 로스가 있는 벽동읍교회 조사를 맡은 것은 영광이었다. 부흥을 사모하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고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로스 선교사와 최봉석은 서로 통하는 데가 많았다.
5년 과정의 평신을 7년에 걸쳐 수학하고 1913년 6월 제 6회로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이다. 그가 신학교 교수를 찾아가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졸업장을 주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는 아멘했으니 졸업장을 달라고 강청했다는 일화, 시험 앞에서는 성령도 쩔쩔맨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후에 총회장을 지낸 김선두 목사도 그와 졸업 동기였다. 그의 3년 선배 중에는 김익두 채정민이 있었고, 1년 선배 중에는 평양산정현교회를 담임한 한승곤 목사가 있었으며, 그 보다 1년 뒤에 졸업한 사람 중에는 한경희 목사와 김장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보다 2년 늦은 졸업생 중에는 방지일 선교사의 선친 방효원과 105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선우훈이 있었다. 그가 평신에 재학하던 시절은 비록 초창기였지만 마포삼열과 라부열 등 쟁쟁한 교수들이 가르치고 있었고,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은 미래의 지도자들이 평신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최봉석은 그런 스승과 동료들과 함께 신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행운아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봉석이 평신을 졸업할 때 선배들과 후배들이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 명단을 제시한다.
 
 
일제에 의해 이 민족이 강탈을 당하던 시대,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훌륭한 선교사들과 탁월한 동료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한국교회 지도자로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는 한국이 민족적 위기를 만나 희망을 잃고 있을 때 지도자로 부름 받은 것이다. 1913년 평신을 졸업한 최봉석은 그 해에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벽동읍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1년간 섬겼다.
 
2. 간도 선교의 개척자, 한국교회의 영원한 전도인
그의 가슴은 언제나 복음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가 무대에 등장하던 그 시대 한국교회는 그런 사람을 목마르게 찾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자신의 전생애 동안 온전히 실천했던 인물인지 모른다. 그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복음의 능력을 소유했으며, 언제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사모하며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기도의 용사였다. 그가 본명보다 최권능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가 평신을 졸업하고 무대에 등장하던 1913년 전후 한국장로교 안에는 해외 선교 열이 어느 때보다도 충천했다. 1907년 독노회 결정에 따라 1908년 이기풍이 제주에 파송되어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고,11 뒤 이어 1909년 졸업생 윤식명과 1912년 졸업생 최태진이 제주도 선교사로 합류했으며, 1912년 졸업생 박태로, 1913년 졸업생 사평순, 김영훈이 중국 산동 지방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09년 졸업생 최관흘이 시베리아의 한인들을 위해, 그리고 1910년 졸업생 주공삼이 도쿄에서 한인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12 1910년 졸업생 최성주, 1911년 졸업생 김덕선과 차형준, 1913년 졸업생 김내범과 1914년 졸업생 한경희가 만주 한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해 1914년 최봉석도 최성주(崔聖柱) 목사와 함께 평북노회에서 만주지방 서간도 전도목사로 파송받고 같은 졸업 동기생 김내범과 함께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만주는 특별한 땅이었다. 그곳은 한국복음화의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만주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와 존 로스(John Ross),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만주의 한국인 개신교인들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던 곳이고13,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한국인들의 협력을 받으며 신약성경을 한글로 처음 번역한 곳이었고, 언더우드 내외가 33명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가서 거기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곳이다.14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면서 간도에는 복음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1901년에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사역자들을 보내달라고 한국교회에 요청해 평안북도 여선교회가 후원하는 사역자 한 사람이 처음으로 압록강 근처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사역하기 위해서 파송되었다. 묵덴(Moukden), 지금의 심양에 있던 존 로스 선교사와 웹스터(Websters) 선교사 내외가 곧 그들을 방문하여 집단적으로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한국인 사역자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정기적으로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했다.15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모판과 같은 간도에 한국교회가 선교사역을 착수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초기 기록 중에는 그 땅을 한국 땅이라고 언급한 기록도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만주로 더 잘 알려진 간도는 수년 동안 중국과 당시의 조선 사이에 영토권 분쟁이 있었고 결국 1909년 중국이 그 땅을 장악했다. 만주 땅에는 중국인들의 수보다 한국인들의 수가 3배나 더 많았고16,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이 살아왔다.
그곳에는 문화적 이질감이 없지 않았다.17 1920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만주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다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로 순교당한 현대선(Lloyd Henderson, 1895-1932) 선교사는 당시 만주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의 문화적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소련 사람이나 중국 사람처럼 살고 있었고 기린 북쪽 지방에서는 중국 관리들에 의하여 한국인들이 한국 옷을 입는 것이 금지되고 한국말은 많이 왜곡되고 소련말과 중국말을 섞어 사용하는데 말하는 사람 자신이 자기가 자기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가끔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18
 
한국 사람이면서도 문화적 이질감 속에 살고 있는 곳이 만주였다. 언제나 선교는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타민족의 선교의 접촉점으로 삼으셨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간도는 중요한 전략적 선교지였다. 게다가 1910년 이후에는 한국인들이 더많이 이주했다. 이에 대하여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함경북도, 만주, 서울 등지에서 전도와 교수사역을 했던 서고도(William Scott, 1886-1976) 선교사는 「간도교회」라는 글에서 1910년 이후 한국인들이 만주로 이주한 주요한 이유로 네 가지를 열거했다.
현재의 이민 경향에는 아마도 네 가지 주요 사유가 있다. (1) 1917년 한국은 어려운 시기였고 (2) 간도는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다. (3) 간도에는 생활비가 적게 들었고 (4) 간도에서의 삶이 사람이 너무 붐비는 한국에서보다 자유롭고 만족을 줄 것이라는 은밀한 소망, 곧 서쪽 지방의 유혹 등이다.19
이런 이질적인 곳, 그러나 복음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그곳 간도에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10년에 접어들어서다. 1910년 제4회 독노회시에 북평안대리회에서 서간도 선교사를 청원했고, 함경대리회와 전도국장이 신학사 김영제 씨를 북간도 전도사로 청원하였으며, 평북대리회 신학사 김진근 씨를 청국 간도에 전도목사로 파송키로20 하였다. 1911년 제5회 독노회시에는 짧은 동안이지만 김진근 목사의 선교 보고가 있었다.21 한국장로교회는 박상순(朴尙純)을 산동성(山東省) 선교사로 파송했고, 김현찬(金鉉贊)을 해삼위(海蔘威) 선교사로, 백봉수를 북간도로, 그리고 이지은 한경회 최봉석 김강선을 서간도에 파송했다.
최봉석이 탁월한 잠재적 미래의 지도자들과 함께 평신에서 신학수학을 받고 신학교 졸업 후 복음에 불타는 신실한 동료들과 함께 전도목사로 남만주 서간도에서 사역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선교 결실도 대단했다. 이는 1915년 제 4회 장로교 총회 때 평북노회가 보고한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별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보고한 내용에 최봉석의 간도 사역이 포함되어 있다.
 
“… 젼도국에셔 량뎐ᄇᆡᆨ 목ᄉᆞ를 셔간도에 파송ᄒᆞ야 四十일 동안 ᄒᆡᆼ슌ᄒᆞ며 사경과 시찰ᄒᆞ엿ᄉᆞ오며 셔간도 최봉셕 목ᄉᆞ 젼도ᄒᆞᄂᆞᆫ 곳에 마귀를 ᄶᅩᆺᄂᆞᆫ 이샹ᄒᆞᆫ 권능도 만히 낫타나고 몃달 지간에 회ᄀᆡᄒᆞᄂᆞᆫ 쟈 여러ᄇᆡᆨ명 이러나셔 곳곳이 교회를 세우며 신학공부ᄒᆞᄂᆞᆫ 동안에 신학 ᄎᆞᆷ예치 못ᄒᆞᆫ 목ᄉᆞ와 조ᄉᆞ들이 교ᄉᆞ슈양회(敎師修養會)로 경치 됴흔 의쥬남산교회로 모혀 강론과 긔도ᄒᆞᆫ일도 잇ᄉᆞ오며 …”22
 
서간도 최봉석 목사가 전도하는 곳에서 마귀가 물러가고 수백 명이나 회개하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보고다. “전도” “마귀가 물러가고” “여러 백 명이나 회개하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단어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성령충만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평북노회는 총회 때 마다 정기적으로 최성주와 한경희와 함께 최봉석의 서간도 전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23 후에 간도에는 간도노회와 남만노회가 설립되어 독자적으로 총회에 자신들의 사역을 보고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24 북간도를 중심으로 한 간도노회는 카나다 선교사들이 관장하거나 감독했고 서간도는 평북노회와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가지며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희망을 잃고 내일에 대한 소망 없이 살아가는 그곳 디아스포라 동족에게 그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소리 높이 외치며 피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마음껏 전한 것이다.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그의 서간도 전도사역을 집약했다.
 
“옹(翁)은 남만전도(南蠻傳道) 十五年의 고상(苦狀)을 말하야 바울이 고린도 교회(敎會)에 달(達)한 편지의 말슴 그대로 세인다 외국인(外國人)의 위험(危險)과 강(江)의 위험원로(危險遠路)의 고생(苦生)과 XX[일본]군의 위협(威脅)과 중국국인(中國軍人)의 위험(危險)과 기근(饑饉)과 불침(不侵)의 고생(苦生)과 가족(家族)이 동사(凍死)할번 한 위험(危險)과 도적(盜賊)의 위험(危險)들로 일관(一貫)하엿든 것이다.”25
 
1914년 평북노회 만주지방 전도목사로 파송받은 최봉석은 12년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다 1926년에 귀국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봉천성 통화현을 중심으로 남만주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증거해 그곳에서 가난과 굶주림과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1926년까지 28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1923년에는 남만노회장을 지냈고 남만노회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메달을 수여 받았다.
 
3. 평안북도 산간 오지를 가슴에 품은 불타는 전도자
그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일제의 수탈로 한국교회와 민족이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귀국 후 잠시 1년 간 평안남도 강동교회(江東敎會)를 맡아 섬기다 1927년부터 산정현교회 전도목사로 임명받고 수안 곡산 지방을 순회하며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다. 산정현교회 파송 전도목사로 섬기면서 서문밖교회 근처 인덕서관(人德書館) 2층에 전도관을 마련하고 평양시내 전도도 열심을 다했지만 그가 주로 온 생애를 바쳐 복음을 전했던 지역은 김인서의 말대로 주로 산간 오지였고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난 고난은 헤아릴 수 없다.
 
“선생(先生)의 사십년(四十年) 갓가운 전도생활(傳道生活)은 거에 전부(全部)를 구성(龜城) 삭주(朔州) 창성(昌城) 벽(碧)동 위원(渭原) 강계(江界) 수안(遂安) 남만(南蠻) 등(等) 각 벽지(各僻地)엇나니 그 위험(危險)과 탁란(綽難) 등(等)의 모든 전도고(傳道苦)를 적근 것은 타인(他人)이 헤아릴 수 업슬만하엿다.”26
 
일설에 의하면 전도를 하다 너무 배가 고파 마분(馬糞) 속에 콩을 추려서 먹고 장마후에는 더러운 개천의 물고기를 배도 따지 않고 먹었으며 일생동안 비단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27 그러면서도 전도하다 그는 수 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가 간도에서 돌아와 1927년 평안도 수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하였던지 동리 사람들이 최봉석을 내쫒으려 했다. 그런 과정에 그가 동리 사람들이 섬기는 신당을 훼파하자 “이에 분노한 동민들은 작대하야 선생을 타살한다”고 덤벼 들었다. 이런 급박한 위기 순간에 달리 그들을 설득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몽둥이와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드는 청년들에게 노회에서 기념으로 준 메달을 내 보이면서 “여보! 그래 남만노회가 기념훈장을 채워준 사람을 이러케 괄시한은 법이 어대잇소”28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노회가 뭔지 알지 못하는 촌 사람들이 총독부가 준 훈장인줄 알고 한 사람 두 사람 물러가는 바람에 위기를 면한 일이 있었다.29
이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전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남의 부억에던 여인이던 기생이던 놉흔 사람 나즌사람할 것업이 맛나는대로 ‘여보 예수 안믿으면 멸망하오’하고 붓잡았다.”30 심지어 낮 모르는 목사 장로들에게도 전도하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웨다”라고 말하면 그는 “신자면 웨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는가”라고 반격했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야단치며 하도 취조하듯이 집요하게 전도하자 이를 본 순경이 그를 데리고 경찰서로 간 적도 있었다. 이때도 그는 “오늘이야 경찰서장(警察署長)과 순사(巡査)들의게 전도(傳道)할 기회(期會)를 엇게 되엿다”며 자진해 앞장서서 경찰서로 향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평양(平壤)에서 전도(傳道)할 때에 2년간(二年間)에 삼천(三千)인의 구도자(求道者)를 어덧다. …평양성(平壤城)에는 남자(男子)나 여자(女子)나 신자(信者)나 불신자(不信者)를 불문(不問)하고 선생(先生)의 전도(傳道)를 멧번식 듯지 못한 사람은 업슬 것이다.”31
그가 개척전도·노방전도를 통해 세운 교회의 수가 무려 74개나 되었다. 그렇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칠십교회(七十敎會) 설립(設立)이란 말이 쉬울넌지 모르거니와 실제(實際)에 한 몸으로 칠십교회(七十敎會)를 세우는 신고(辛苦)는 막대(莫大)하엿든 것이다. 단(單) 칠십인(七十人)을 주(主) 압헤 인도(引導)하는 일도 위업(偉業)이라 하겟거늘 일생(一生)에는 칠십교회(七十敎會)를 세우는 일은 교회사상(敎會史上)에 특필(特筆)할 위업(偉業)이라 아니할 수 업는 것이다.”32 이미 김인서 보다 2년 앞서 1931년 『신학지남』 기자는 60의 나이에도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복음전도에 헌신하고 있던 최봉석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전도(傳道)의 권능자(權能者) 최봉석(崔鳳奭) 목사(牧師)님은 육십노년(六十老年)에 아직도 곡산지방(谷山地方)에서 큰 열심히 전도(傳道)하고 계시다. 길에서 맛나뵈옵고 “목사(牧師)님 전도(傳道)하시기에 얼마나 수고(受苦)하십닛가” 무럿드니 최목사(崔牧師)님 말슴이 “나는 수고(受苦)업고 내게는 영광(榮光)이오. 내게 전도(傳道)를 듯는 불신자(不信者)들이 수고(受苦)하지오”하신다. 이는 불신자(不信者)를 붓들고 듯는 자(者)가 땀날만치 무섭게 전도(傳道)하신다는 말슴이다. 참말 불신자가 수고(受苦)하도록 전도(傳道)하여야만 구도자(求道者)를 얻을 것이다. 불신자(不信者)가 수고(受苦)하도록 한은 전도(傳道)! 이는 참 놀납은 전도(傳道)이다. … 남에 부엌에던 여인(女人)이던 기생(妓生)이던 놉흔사람 나즌 사람 할 것 업이 맛나는 대로 “여보 예수 안 믿으면 멸망(滅亡)하오”하고 붓잡는다. 혹시(或時) 최목사(崔牧師)의 전도(傳道)한은 방법(方法)은 무식(無識)스럽고 체면(體面)업다고 남으리는 말을 종종(種種)듯게된다. 그러나 초대식(初代式) 전도자(前導者) 조선(朝鮮)의 최봉석(崔鳳奭) 목사(牧師)는 육십평생(六十平生) 삼십년(三十年) 전도(傳道)에 임우세운 교회(敎會) 칠십교회(七十敎會)이라 한다. 칠십교회(七十敎會) 창립(創立)이란 세계(世界) 전도사상(傳道史上)에 특필(特筆)할만한 업적(業績)이 아닌가. 우리는 미국(美國)에나 일본국(日本國)에 잇는 대전도자(大導道者)를 숭배(崇拜)할 줄은 알되 하나님이 우리의 따에 보낸 전도자(傳道者)를 존경(尊敬)할 줄은 모르는가 십더라. 한 사람으로서 단 일곱 교회(敎會) 세우기도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여든 칠십교회(七十敎會)를 세운 우리의 전도자(傳道者) 최봉석(崔鳳奭) 목사(牧師)님의게 머리를 숙여 존경(尊敬)함이 가(可)하다.33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는 한 인물, 그것도 60세에 불과한 한 인물을 영향력 있는 교단지에서 소개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다. 단순한 소개 차원을 넘어 “세계 전도사상에서 특필할만한 업적”이라고 극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30년을 한 결 같이 복음전도에만 전념해온 최봉석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신학지남』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최봉석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너무도 인색했다. 어쩌면 김인서가 다음과 같이 탄식할 만도 했다. “예배당(禮拜堂)ᄯᅳᆯ은 비석(碑石) 거리가 되려하고 선교사(宣敎師)의 기념식(記念式)은 쉬일새 업지만 이럿듯 위대(偉大)한 우리의 전도자(傳道者)을 위(爲)하야는 기념비(記念碑) 한 개도 업다. [하긴] 기념비(記念碑)를 세워 무엇하리오. 평안도(平安道)와 남만주(南蠻洲)들에 널녀선 칠십교회(七十敎會)는 영원(永遠)한 기념(記念)이다.”34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최봉석 목사가 택한 전도 “방법은 무식스럽고 체면” 없는 방식이라고 종종 비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용하던 그 원색적인 전도방법이다.35
 
4. 능력과 이적의 종, 최봉석
최봉석은 주님을 처음 만날 때부터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다. 김인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십육세(二十六歲)에 비로소 입신(入信)하야 그ᄒᆡ 어느 밤에 하늘에서 불덩이가 흉상(胸上)에 ᄯᅥ러짐애 기절(氣絶)하엿다가 ᄭᅢ여난 뒤에는 금일(今日)ᄭᅡ지 열렬(烈熱)한 신앙(信仰)을 계속(繼續)하ᄂᆞᆫ중 권능(權能)과 이적(異蹟)이 많이 나타낫나니 선생(先生)의 신앙(信仰)은 당초(當初)부터 기적적(奇蹟的)이엇든 것이며 입신(入信)이래 새벽 기도(祈禱)를 ᄭᅳᆫ치 안엇고 무수(無數)한 곤란(困難) 즁에도 병(病)으로 드러눕어 보지 못하엿다 한다.”36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를 통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기사와 이적은 참으로 많다. 1920년대 김익두를 통해 놀라운 신유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김익두 못지 않게 능력의 종으로 쓰임 받은 사람이 바로 최봉석 목사였다. 그가 안수기도를 해서 고침을 받은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최권능이라는 별명은 그를 통해 수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31년 『신학지남』에는 그를 통해 나타는 신유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최목사님이 어느 촌(村)에서 불신자(不信者)가 수고(受苦)하도록 전도(傳道)하고 나온즉 그 집 노인이 아마 기절(氣節)하야 죽은 상태(狀態)에 이르럿다. 그 자녀(子女)들이 곡(哭)하면서 최목사(崔牧師)를 원망(怨忘)하거늘 다시 그 집에 드러나서 죽은 노친(老親)이 사러나면 예수 믿겟다는 그 자녀(子女)들의 약속(約束)을 받고 최목사(崔牧師)가 함ᄭᅴ 기도(祈禱)하엿드니 그 노인(老人)이 회생(回生)한지라. 그 후로 그 가정(家庭)이 예수를 믿고 그 동리(洞里)에 교회(敎會)가 선일이 잇다. 그 후로 최목사(崔牧師)를 최권능(崔權能) 목사(牧師)라는 작호(綽號)로 최권능(崔權能)이라고 부른다.”37
 
김인서에 의하면 이 사건은 구성에서 일어났고, 이적을 체험한 집주인은 김씨다.38 최봉석을 통해 신유의 역사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돈을 다시 찾는 특별한 역사도 나타났다. 벽동에서 전도할 때 그곳 교인 중에서 조관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9인합자회사에서 돈을 잃고 “동사건불신문제(同事間信用問題)”로 큰 고민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이를 본 최봉석은 그에게 “기도하면 돈도 찻게되고 동사동의심(同事同疑心)도 풀닌다”고 위로하고 1주간 기도회를 열었다. 그런데 기도회 칠일 마지막날 조씨 상회에 십원지폐를 바꾸러 온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단서가 되어 도적질한 사람을 경찰에 알리지 아니하고 잃어버린 돈을 전부 찾았으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돈을 훔친 사람이
나 다 무사하게 되었다. 마지막 기도회 3장 찬송을 부를 때 돈을 찾은 소식이 최봉석 목사에게 전달되었다.39 그가 잃어버린 돈을 다시 찾은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선생(先生)이 남만(南蠻)에서 전도(傳道)할 ᄯᅢ에 모히는 노회(老會)에 참석(參席)하랴고 나오댜가 안동역(安東驛)에서 청인(淸人)의게 로비(路費) 사십원(四十圓)을 도적(盜賊) 마치엇습니다. 선생(先生)은 기도(祈禱)하고 나서 ‘도적(盜賊)이 엇지 아ᄂᆞ님의 죵의 성회노비(聖會路費)를 먹을수 잇느냐’ 장담(壯談)하고 의주(義州) 주인집에 와서는 아모 근심업시 돈 도라 오기만 기다린즉 방인(傍人)이 다 조소(嘲笑)하얏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도적(盜賊)한 청인(淸人)은 선생(先生)의 돈지갑을 그만 노상(路上)에 낙실(落失)한 것을 어느 신자(信者)가 즙게 되여 여러본 즉 사십원(四十圓)과 최봉석(崔鳳奭)이란 도장(圖章)이 잇섯습니다. 그래서 그 돈지갑은 그날 ᄒᆡ지기 전에 최목사(崔牧師)의 손에 도라왓습니다.”40
 
최권능은 벽동 예배당을 건축할 때 새 예배당에 하늘 영광이 친히 나타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일도 있었다. 그는 남만주에서 사역할 때 자연재해 앞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 창수가 나는 바람에 교인들의 집과 교회당이 물에 휩쓸려 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천둥번개가 치는 하늘 아래서 이렇게 기도했다.
 
“창수(漲水)야- 물너가라. 네-능히 하나님의 예배당(禮拜堂)에 침입(侵入)치 못하리라. 하ᄂᆞ님 아바지시여! 저 흉용(凶湧) 창수(漲水)를 막어 주시옵소서.”41
 
어쩌면 지극히 하나님의 권능을 의뢰하는 믿음의 용사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어리석은 무대뽀 같은 신앙인의 기도 같기도 하다. 하나님은 “충복(忠僕) 최봉석(崔鳳奭)의 기도(祈禱)에도 응답(應答)”하셨다. “수력(水力)에 ᄲᅮ리ᄲᅡ진 대수(大樹)를 물에 밀려 예배당(禮拜堂) 골 압 나즌 목을 가르질너 막고 사태(沙汰)가 그 나무웨 싸히여 창수(漲水)는 예배당(禮拜堂) 골 스스로 밀지 못하고 넘엔골스로 흘너나리엇다.”42 그는 일생동안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믿음의 용사였고, 성령의 권능을 의지했던 능력의 사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도의 권능자”라고 불렀다. 그의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는지 김인서는 이렇게 집약했다.
 
“최권능(崔權能) 목사(牧師)의 기사(奇事)와 일화(逸話)는 일우다-적을 수 업는 것이니 …기도(祈禱)의 권능자(權能者)일거나 백세(百世)에 최권능 목사(崔權能 牧師)라고 불너 맛당하엿다. 누가 기도(祈禱)의 위력(偉力)을 부인(否認)하는가. 누가 금세(今世)에 기사이적(奇事異蹟)이 업다고 하는가. 신앙(信仰)에는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이 ᄯᅡ르는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 우리 최권능 목사(崔權能 牧師)의 전기(傳記)이다. 누가 지혜(智慧)를 자랑하는가. 하ᄂᆞ님은 세상(世上)이 미련하다하는 전도자(傳導者)와 함ᄭᅴ 하심을 증거(證據)하는 것이 우리 칠십교회(七十敎會)의 아바지의 전기(傳記)이다.”43
 
5. 신사참배반대운동의 또 한 명의 주역
최봉석이 전도목사로 사역하면서 남긴 족적은 너무도 대단하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은 신사참배반대운동사에 그가 남긴 남다른 족적이다.44 그에게 복음전파와 진리를 위한 싸움은 별개가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앞에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갈라디아서 1장의 바울의 심장이 바로 그의 심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봉석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고, 그의 역할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1938년 9월 제 27차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적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순교한 이들이 50여명이었고, 반대하다 옥중에서 해방되면서 출옥한 성도들도 약 50여명이었다.45 최봉석은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서다 주기철 박관준 박의흠 서정명 등과 함께 순교했고,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채정민 방계성 이인재 김린희 손병복 안이숙 최덕지 등은 출옥했다.
최봉석이 전국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좀 더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지만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첫째는 최봉석이 동양선교회(성결교회) 지도자들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의 확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북선(北鮮) 지방의 이건을 비롯해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장로교 최봉석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며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둘째는 최봉석과 주기철 목사와의 깊은 영적관계이다.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하기 전부터 최봉석과 산정현교회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 14년간의 전도목사로 간도에서 사역하고 돌아온 최봉석은 1927년 산정현교회 전도목사로 파송받았다. 1936년 주기철이 부임한 후 산정현교회가 이듬해 1937년 새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해 9월 5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산정현교회 교우들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주기철 목사도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건축이 완공되기 전, 산정현교회가 교회 건축을 생각하기 전 1933년 최봉석은 산정현교회 구 교회당에서 5-6개월 동안 새벽마다 새예배당을 달라고 간구했다. 김인서는 『신앙생활』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산정현(山亭峴) 새 예배당(禮拜堂)은 화려차웅장(華麗且雄壯)하게 건축(建築)되여 구월 오일 주일(九月 五日 主日) 입당예배(入堂禮拜)를 올니엇다. 주기철 목사외(朱其徹 牧師外) 제직(諸職)과 교인(敎人)들의 성력(誠力)이 컷슴은 물론(勿論)이다. 그러나 예배당(禮拜堂) 건축(建築)의 논의(論議)도 업든 삼년전(三年前)에 오육개월(五六個月) 동안이나 새벽마다 구예배당(舊禮拜堂)에 업대여 새 예배당(禮拜堂) 달나고 간구(懇求)한 최권능 목사(崔權能 牧師)의 기도(祈禱)가 이슨 거슬 아는 니는 적다. 새 예배당(禮拜堂) 허락(許諾)바덧다고 깃버하는 그때 최 목사(崔 牧師)의 말을 이제야 나도 깨다랏다.46
 
이렇게 해서 대지 967평에 건평 414평 2층 벽돌의 웅장한 새 예배당이 완공된 것이다.47 “이 입당 예배 때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이 최권능 목사였다.”48 이후에도 둘의 관계는 매우 끈끈했다. 신사참배가 몰아칠 때 주기철 곁에는 언제나 대 선배 최봉석이 지키고 있었다.49 주기철 곁을 많은 사람들이 떠났을 때도 최봉석은 채정민, 이인재, 방계성, 안이숙과 함께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뜻을 같이했다.50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동료와 후배들을 독려하며 의로운 투쟁을 중단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는 최봉석은 1938년 제 27차 총회 이후 기울어져 가는 한국장로교회 안에 신사참배반대운동의 불을 지피는데 중요한 일익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안용준은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교회에 신사참배가 이러난 후 최 목사님은 몇몇 신앙동지들과 호응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르켰다. 특히 마두원 선교사 같은 이에게서 전도지를 얻어가지고 각처로 도라 다니시면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가르치고 공격하셨다. 최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신사참배 정려하는 교회 출석을 금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렇게 2년간이나 하셨는데 특히 노회 때 같은 데서는 가서 목사들에게 경고를 하셨다. -하나님 떠난 노회는 뫃여서 무엇하겠느냐고! 그러면 시국 인식한 목사님들은 최 목사님을 미치광이로 돌렸다. 그 때 양노원의 책임자 이모(李某) 목사에게 경고를 하니 ‘이놈의 영감 즉사해라’라고 저주를 했다고한다. 최목사님이 2년간이나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국자들이 그를 광인(狂人)으로 보았던 까닭이었다.”51
 
신사참배를 한 이들이 최 목사를 고발하는 바람에 1940년 가을 평양본서에 들어가 50일을 검속 당했다.52 그래도 그는 중단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를 외쳤다. 처음에는 개인 차원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1939년 여름부터 지역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다 1940년 접어들어 전국적인 연대운동으로 발전했을 때 최봉석은 개인 차원이던 조직적인 차원이던 언제나 주기철과 뜻을 같이하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그 중요한 근거는 1940년 3월말부터 4월까지 가진 일련의 비밀결사 모임의 참석과 활동이다. 1945년 5월 18일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최봉석의 활동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53
 
 
우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일련의 모임이 지속적으로 열렸고, 최봉석은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철이 위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투옥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4월 22일에는 갓 출옥한 주기철도 참석했다.
이렇게 해서 1940년 4월 22일 평양 장별리 2번지 채정민 목사 집에서 가진 모임에는 주기철과 최봉석이 나란히 참석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신사참배반대를 위한 전반적인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지만 궁성요배 문제를 조율하기 위한 성격의 모임도 있었다.54 이날 참석한 이들은 주기철, 최봉석 한상동 김린희 이인재 안이숙 오윤선 방계성 김형락 박의흠 이광록 김의창 등 13명이었다. 주기철 부처, 채정민, 최봉석, 김의창, 방계성, 오윤선, 안이숙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고, 한상동 목사는 경남에서 올라왔고 이광록 박의흠은 평북에서 주기철 목사를 만나러 왔다가 채정민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이 모임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함께 모였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모임을 갔다 한상동을 비롯 경남 지역에서도 참여하는 전국적인 성격의 모임이었다. 둘째, 신사참배반대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한 모임이었다. 한상동은 기존 노회를 거부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노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기철은 새로운 노회 재건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신중하자는 것이고, 신사참배반대로 인해 교회 분열의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였다. 자료를 종합할 때 최봉석도 주기철과 같은 입장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현 노회가 신사참배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세력을 더 많이 확보하고 기존의 노회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었다. 따라서 제도권의 어용노회의 지시를 거부할 필요가 있다는데 공감했다. 콘스탄티대제 시대 이 땅의 교회가 보여주듯 정권에 편승하고 권력화된 교권에 편승하는 교회와 개인은 언제나 세속화의 길을 면치 못했다. 다른 복음 앞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고 전파의 대상이며, 양보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다.
1940년 8월 일제는 이 모임을 “비밀결사” 모임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참석한 이들을 검거하여 평양으로 압송했다. 1940년 12월 제 2차로 평양본서에 검속된 최봉석은 주기철, 채정민, 방계성, 오윤선, 이인재, 이광록, 안이숙 등과 함께 평양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여러 곳으로 다니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불리한 취급을 받았다.55 유치장 감방 1호에는 이광록 집사, 2호에는 최권능 목사, 3호에는 이인재, 4호에는 주기철, 5호에는 방계성, 6호에는 채정민, 7호에는 오윤선이 수감되었다.56 주기철 곁에 최봉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최봉석 곁에 주기철과 안이숙이 있었다. 이들은 긴 투옥 과정을 겪어야 했다. 3년이 지난 1943년 마산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체포된 손명복과 최덕지가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합류했다. 심군식은 이렇게 기록했다.
 
“손명복 전도사는 남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감방으로 들어가고 최덕지 전도사는 여죄수들이 구감된 제 5감방에 들어갔다. 남자 감방엔 최상림 주기철 이기선 최봉석 한상동 주남선 등의 목사들과 이인재 이현속 전도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등 낮 익은 분들이 많이 있었다. 손명복 전도사는 형무소 1동 제 4감방에 수감되었다. 옆방 제 5감방에는 이현속 전도사가 있었다. 제 6감방엔 최봉석 목사, 제 7감방엔 주기철 목사가 수감되어 있었다.”57
 
3년 전의 호실과 바뀐 것은 수감자들을 자주 이동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이 때 최봉석과 주기철은 나란히 수감생활을 했다. 모두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아마도 가장 나이가 많은 최봉석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다. 70이 넘어 투옥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주기철이 당당하게 맞설 수 있도록 평신과 목회의 선배로서 그를 독려하고, 그 아래 같이 투옥된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다. 1941년 10월 곽안련(Charles Allen Clark)은 고국에 보낸 편지에서 이들의 힘겨운 투쟁을 역사 속에 걸출한 인물들과 비견하며 높이 평가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인 주기철과 다른 뜻을 같이 하는 신사참배반대 지도자들을 존 후스에 비견하며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같은 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를 돕고 있는 방 장로도 거의 대부분 시간을 주 목사와 함께 보냈습니다. 최근 주기철 목사가 너무 많이 매를 맞아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을 때 방장로가 그를 업고 감방까지 데려다 준 일이 있으며 이기선과 나이 많은 최봉석 외에 12명 정도가 그 안에 있습니다. 신사에 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게, 혹은 짧게 감옥에 갇혔던 기독교인은 근 5천명이 됩니다. 지금도 신앙을 지키며 갇혀 있는 교인이 2백명은 넘을 것입니다. 다만 몇 명의 교인이라도 이 같은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한국교회가 ‘배교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58
 
우리는 곽안련의 편지에서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적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사실이다. 5천명이 되는 사람들이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사실, 그 결과 옥살이를 감수해야 했다.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복음은 사이비다. 마찬가지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개혁주의는 사이비다.
둘째,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주기철 최봉석 이기선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어도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서 있고 그런 방향으로 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일제에 의해 도태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바로 주기철 최봉석과 같은 신앙인들의 절개가 있었던 것이다.59
셋째, 위 인용 마지막에 있는 곽안련의 멘트가 매우 의미 깊다는 사실이다. “다만 몇 명의 교인이라도 이 같은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한국교회가 ‘배교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신앙의 순결을 지킨 이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과 역사 앞에 선 소수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고 세례요한이 그랬으며 사도들이 그랬다. 바울과 폴리갑과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과 낙스가 그랬다. 언제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역사 앞에 서는 것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하나님앞에 선다는 것은 곧 역사 앞에 서는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평양지방법원의 예심은 참으로 길고 길었다. 1945년 5월 18일자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60
 
그런데 위 명단에는 최봉석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순교자 주기철의 이름도 없다. 그것은 이미 이들은 1944년 4월 신사참배운동에 앞장서다 순교했기 때문이다. 최봉석은 철저히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39년 5월에 체포되어 5년간의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1944년 76세의 고령의 몸으로 3월 1일부터 40일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이후 기록은 약간씩 상이하다. 안용준은 1944년 4월 6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최봉석은 40일 금식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몸이 쇠잔한 상태에서 금식을 하다 초 죽음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4월 5일 변호사를 통해 보석원을 제출했고 4월 6일 11시에 미결 감에서 최목사 시체를 찾아가라는 통지가 왔다. 이와는 달리 이덕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단식은 죽음을 끌어당겨 남은 고난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40일 금식 기도를 마친 4월 10일에 이르러 그의 몸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형무소 당국은 [4월 15일] 병보석으로 그를 가족들에게 인계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에 입원시켰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4월 25일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이 나를 오라고 부르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닷새 전 형무소 안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바로 그날이었다.”61
이렇게 해서 그는 주기철과 함께 진달래 피던 4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의 죽음이 순교였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봉석은 주기철, 이영한, 최상림, 박의흠, 김승용, 김현속, 김병일, 김용훈, 김련 등 수많은 이들과 함께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영광스런 죽음을 맞은 것이다.62 주님께서 이들의 순교를 받으시고 이 땅의 교회를 든든하게 지어가셨다.
 
맺는 말
교회사학자로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참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더욱 그랬다. 교회사가로서 이런 역사에 빛나는 인물을 제자리에 올려놓지 못했다는 반성과 자성에서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주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절개를 지키며 조국교회와 이 민족을 가슴에 쓸어안았던 주기철이나 최봉석과 부족한 나의 모습이 너무도 비견되었기 때문이다. 최봉석은 그 이름 자체가 신화처럼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는 너무도 빈자의 삶을 살았다. 참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살았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구호가 아니라 온 몸으로 초지일관 실천했던 그의 실천적 모토였다. 신학적 깊이와 역사적 지식이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충성만큼 따라주지 못했지만 그의 생애는 성경에 지극히 충실하고 믿음에 굳게 섰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온 몸에 가득 품고 살았던 생애였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그처럼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은혜(sola gratia), 오직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일생동안 온 몸으로 자신의 삶 속에 구현하며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았던 믿음의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세속화의 시대, 비진리와 타협하며 적당하게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가 그의 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세상의 물욕과 명예를 초극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최봉석, 그러면서도 복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일생동안 가슴에 간직하고 실천하며 살았던 최봉석은 이 시대의 사표임이 틀림없다. 얼마든지 타협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런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76세라는 고령에도 조국교회와 이 민족을 가슴에 품고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무릎으로 나갔다. 건강한 사람들, 좋은 환경에서도 40일 금식은 생명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옥중에서 40일을 금식했다는 사실은 곧 살인적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의 옥중 금식은 기도하다 옥중에서 순교하기를 각오했다는 말 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최봉석 그는 온몸으로 복음을 외치고 실천했던 지도자, 말로만의 복음이 아닌 온 몸으로 실천했던 실천인, 복음전파와 선교와 교회 개척에 앞장선 인물, 그리고 신사참배반대 강요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역사 앞에 살았던 한 인물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메말라 가고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이 판을 치고 있다. 한국교회가 무너져 가고 세상의 조롱거리와 치욕거리로 전락하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거리에 복음을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있다면 이단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전도지를 들고 아파트나 연립 주택 현관 벨을 누르는 이들도 거의 다 이단들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어디에서나 들리는 그날이 다시 찾아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간절히 염원하는 것은 말로만의 외침이 아닌 일생동안 온 몸으로 복음을 사랑하고 외치고 실천했던 최봉석과 같은 지도자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서기를 좋아하는 오늘날, 허울 좋은 복음의 옷만 입고 인기만을 받고 싶어하는 오늘날, 남들이 피하는 자리에서 주님의 향기를 드러냈던 최봉석과 같은 지도자가 너무도 그립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던 최봉석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글을 마무리하며 나의 흩어진 신앙의 옷깃을 다시 여민다. <끝>
 
[후주]
1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송길섭을 거론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최봉석에 대한 평가에 한국교회사가들이 인색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데 의미가 있다.
2 그의 관한 몇가지 사료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최봉석”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 기독교문사, 1984), 798-799; 이영헌, “최권능목사전(崔權能牧師傳),” 『교회와 신학』5 (1972); 안용준, “권능(權能)의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 『파수군』55 (1956), 62-72;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崔鳳錫牧師) 편언(片言),” 『신학지남』13권 6호 (1931년 11월), 31-32;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신앙생활』 2권 5호 (1933년 5월), 24-28. 자료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가장 기본적인 그의 출생 년도나 입신(入信)한 연도도 서로 다르다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기독교대백과사전』은 1869년으로 출생년도를 기술하고 있는데 반해 안용준은 최봉석의 출생년도를 1870년으로 언급하고 있다.
3 “최봉석”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 기독교문사, 1984), 798.
4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4-25.
5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그의 죄명을 공금횡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봉석” 『기독교대백과사전』, 798.
6 김승태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1994), 375.
7 “최봉석” 『기독교대백과사전』, 798.
8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서울: 서울신문내교회당, 1928), 202-203.
9 김승태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423-424.
10 박용규, 『한국장로회사상사』(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3), 66-67.
11 Catalogue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at Pyeng Yang, Chosen, 13 ; 馬布三悅, “長老會敎神學校 略史,” 『神學世界』 (1916년 1월), 165.
12 Catalogue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at Pyeng Yang, Chosen, 13
13 Roy E. W. Shearer, Church Growth of Korea (Grand Rapids Mi: Eerdmans, 1966), 33.
14 James. H. Smylie, The Underwoods, Go Therefore, ed. by Carry Patrick. Atlanta: Presbyterian Publishing House, 1987, 27-28.
15 Whittemore, N. C. “The Call of Manchuria,” KMFIX:12 (Dec., 1913), 326 ; 박기호, 한국교회 선교운동사, 110-11.
16 Hugh. Miller, “A Visit to West Kando,” KMFXⅣ: 11 (Nov., 1918), 227.
17 Cook. W. T, “Itinerating in Manchuria,” KMFXVI: 11 (Nov., 1920), 227. 여러 면에서 한국과는 아주 달라서 언어는 중국어였고 날씨는 훨씬 더 추웠으며 땅은 황량했고 사람들은 이질적이었다.
18 Lloyd Henderson, “A Visit to Some Korea Churches in North Manchuria,” KMFXXV: 3 (March 1929), 46.
19 Scott. W, “The Church in Kando,” KMFXIV: 9 (Sep., 1918) 187.
20 『제 4회 독노회록』, 1910. 9. 15, 22.
21 『제 4회 독노회록』, 1910, 22; 『제 4회 독노회록』, 1911년, 5, 9.
22 『제 4회 독노회록』, 1915, 46.
23 『제 6회 독노회록』, 1917, 62.
24 제 12회 총회록 1923, 1-10.
25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26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27 안용준, “권능의 전도자 최봉석,” 68.
28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崔鳳錫牧師) 편언(片言),” 『신학지남』 1931, 32;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29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崔鳳錫牧師) 편언(片言),” 『신학지남』1931, 32.
30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崔鳳錫牧師) 편언(片言),” 『신학지남』1931, 32;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31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26.
32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33 “傳道者 崔鳳奭 牧使의 片言,” 『신학지남』1931, 31-32.
34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35 “傳道者 崔鳳奭 牧使의 片言,” 『신학지남』1931, 32.
36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5.
37 “傳道者 崔鳳奭 牧使의 片言,” 『신학지남』1931, 31-32.
38 “龜城에서 傳道할 ᄯᅢ에 한 집에 드러가 주인 金氏의게 悔改하라고 웨치고 나와서 他家에 드러간 뒤에 金氏는 죽어 너머젓습니다. 金氏의 아들은 先生을 殺父之?로 잡어서 自己 집에 가두엇습니다. 이ᄯᅢ에 先生은 死者의 아들을 향하야 ‘회개하고 예수를 밋고 祈禱하면 네 父親을 살닐터이니 예수 밋겟느냐’고 大膽히 말하엿슴니다. 先生은 偉大한 信仰 者일거나 今日 敎會에 이럿듯한 信仰者나 이럿듯 膽大한 前導者가 멧사람이나 잇는가. 死者의 아들은 ‘밋겟습니다’고 말하엿슴니다. 於是乎 先生은 그 家族들을 自服식히고 죽어 너머진 쟈를 붓들고 ᄯᅡᆷ을 흘니면서 기도하엿슴니다. 異蹟일세 榮光일세-氣絶하여 죽엇든자가 숨을 쉬고 사러낫습ᄂᆡ다. ‘할네누야 아멘’ 朝鮮敎會史上에 이런 일은 두 번도 잇지 아니하엿다. 누가 今日에 神癒를 否認하는가. 사러난 金氏의 全家族은 예수 밋고 새로 敎會가 서게 되엇슴니다.”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6.
39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6.
40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7.
41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7.
42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7.
43 김인서, “七十敎會의 아바지 崔鳳奭,” 27.
44 안광국, 『한국교회 선교 백년 비화』(서울: 대한에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79), 71.
45 채기은, 『한국교회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01.
46 “平壤之片言,” 『信仰生活』 1937년 9월, 42.
47 김광수, “산정현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8권(서울 : 교문사, 1982), 738.
48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156.
49 김인서,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전집 5 (서울: 기문사, 1969), 131.
50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이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2003), 232-233. 이덕주는 이렇게 기록했다. “주기철 목사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라고는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지 오래된 채정민(蔡廷敏), 최봉석(崔鳳奭) 목사와 평양 장로회 신교 재학 중이던 이인재 전도사 그리고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로 함께 사역하던 방계성, 백인숙(白仁淑) 전도사 정도에 불과했다.”
51 안용준, “권능(權能)의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 68-69.
52 안용준, “권능(權能)의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 69.
53 “李基宣 外 二十人 豫審終決書” (平壤地方法院, 1945. 5. 18).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376.
54 채기은, 『한국교회사』, 100-103.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이 궁성요배인데 여기에 대해 의견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좀 더 포용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 의견이 있었다. 4월 22일 모임은 이를 조정하기 위해 모임을 가진 것이다. 이날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천황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해서 절을 한다고 죄라고까지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이런 의견을 개진한 이들은 주로 원로급의 인물들이었고, 이들 역시도 예배의식에 앞서서나 의식 가운데 섞어서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한 의견은 절대로 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참배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입장이었다. 주기철 목사와 채기은에 따르면 이기선 목사는 궁성요배에 순응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55 안용준, “권능(權能)의 전도자(傳道者) 최봉석목사,” 70.
56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137. 안이숙의 이 기록을 민경배와 이덕주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인용하였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221.
57 심군식, 『손명복 목사의 생애와 설교』, 57.
58 Charles Allen Clark, Letter, October 1 1941.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322-323 재인용.
59 거의 같은 관점을 최훈의 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최훈, “신사참배와 한국재건교회의 역사적 연구,” 김승태 편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133.
60 “李基宣 外 二十人 豫審終決書” (平壤地方法院, 1945. 5. 18).
61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이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327. 또한 심군식, 『손명복 목사의 생애와 설교』(서울: 영문, 1997), 62-63과 한석희, “신사참배의 강요와 저항,” 김승태 편, 『한국교회와 신사참배문제』(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86을 보라.
62 『제 67회 총회록』, 1982, 89.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7.11.29 23:27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