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독립운동 100주년 특집

 

1919년 3월1일부터 5월 30일까지의 삼일독립운동과 관련 통계

  궐기한 부군府郡수는 211개

       집회 수는 1,542회

        참여 인원은 2,023,098명

사망자 수는 7,509명

부상자 수는 15,961명, 수감자는 46,948명

 

삼일독립운동에는 ‘독립선언서‘와 이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이들의 후속부대인 16인, 그리고 삼천리 방방 곳곳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한 이천만 한민족이 있었다. 삼일독립운동은 종파에 관계없이 오직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독립선언서‘ 말미에 민족 대표 33인으로 서명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온 천하에 ’한민족의 독립‘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 독립선언은 모든 이천만 한민족의 가슴에서 울려 퍼져 삼천리 방방 곳곳에서 만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삼일독립운동은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한 고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인 3월3일 이틀전인 3월 1일에 시작하였다. 최남선과 한용운에 의하여 미리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민족대표들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고 일제 관헌에 붙잡혀 갔다. 그런데 민족대표들인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지방에서 따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정주에서 삼일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불행히 정주에서는 사전에 계획을 알아차린 일본 헌병대에 의해 만세운동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은 의주, 선천, 원산, 함흥에서도 일어났다. 선천에서는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하였고, 원산에서는 민족대표인 정춘수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월 8일에는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문시장에서 이만집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하며 만세운동을 하였다. 때마침 이달이 대구 장날이어서 경상북도 각처에서 모인 백성들이 함께 만세 운동에 동참하여 3월 10일까지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3월 10일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광주 북문안 작은 장터에서 시작하고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가세하여 천여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3월 11일에는 부산에서 일신여학교 1백여명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지만 10분만에 끝나 버리고 잡혀갔다.
3월 13일에는 전주 장날을 기하여 오백 여명이 만세를 외쳤다.
3월 18일에는 경상북도 영덕에서 영해 장날을 기해서 만세운동을 하였다.
3월 21일에는 전라남도 목포에서는 남교동과 법원 그리고 항동까지 진출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일에는 충청남도 천안에서 아우내 장날을 기해서 만세운동을 했다. 이때에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가했었던 유관순도 함께 있었다.
그 외에도 삼일 만세 운동은 삼천리 방방 곳곳의 각 지방에서는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하였다.


한편 정주와 같이 군산에서도 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많은 백성들이 체포/연행되기도 하였다.

 

지역별으로 삼일독립운동의 전개과정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참고문헌


편집부. “3·1운동과 한국 교회 평신도 운동”. 본질과 현상 36, 호 (2014년) 73–90.

우리역사넷, 근대 정치, 3.1독립 선언서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701&tabId=01&levelId=hm_123_0040


최종 편집일: 2019년 2월 21일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19.02.2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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