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학파 전통에 선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된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평양신학교를 통하여 형성된 구학파의 정통주의가 박형룡박사에 와서 한국적인 형태로 체계화된 것은 그의 신학교육의 배경을 살펴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프린스톤이 교과과정을 재개편하기전인 1923년부터 26년까지 프린스톤에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로 널리 알려진 당대의 보수주의 거장 메이첸 밑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구프린스톤의 변증학적 전통과 반현대주의 사상을 전수 받았다. 평양신학교에서의 교수활동과 그의 「현대신학난제 선평」은 그를 정통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만들기 에 충분하였다. 이런 신학적인 배경은 그의 사상을 특징지워 주었던 것이다...(계속)

 

 

    한국신학사조의 복음주의적 고찰

       -한국신학사에서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의 공과를 중심으로-

 

I. 들어가면서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사조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격변의 변천 과정을 거쳐왔다. 기독교 사상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서 지성사는 일대 변혁을 맞았다. 하나님이 실천 이성을 결정 짓는 기준이 되는 대신 실천 이성의 어떤 원리로 격하되어 버린 칸트의 인식론은, 비 비 워필드(B.B. Warfield)가 지적한 것 처럼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 내리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는 하나의 실제적 혁명”이었다.  칸트의 주관주의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에 의해 소위 절대 의존감정의 주관주의적 사상으로 계승되고 이것은 결국 알브레흐트 리츌 (Albrecht Ritschl)의 사상에 길을 터주었다.  리츌에 와서 기독교의 초자연주의 신앙은 거부되고 기독교는 도덕적 패라다임으로 대치되었다.  그는 계시를  순전히 인격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기록된 계시의 여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개인주의적 교리 이상의 어떤 것을 물려 줄 수 없었다. 자연주의 철학자들, 불신앙의 과학자들, 그리고 회의주의 역사가들의 공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구하려고 희망하였던 동기가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서 알맹이를 뽑아버리는 19세기의 보편적 오류에 기독교를 빠트리고 말았다.  그후 기독교 사상사는 걷잡을 수 없는 격변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갖고 기독교 사상사를 수정, 교리사에서 “정통성”을 제거하여 기독교 사상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성경을 계시로 보는 전통적인 성경관이 무너지고 성서를 하나의 시대적 산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에서 시작한 성경 고등비평이 계몽주의로 특징되는 이성의 시대의 유럽 기독교 지성계를 휩쓸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종교를 시대적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움직임이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어나 종교진화론, 종교 사학파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유럽 기독교 지성사는 말 그대로 격변의 시대, 변천의 시대였다.

        유럽 기독교 지성사의 변천이 19세기 중반부터 미국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청교도 개혁주의가 지배하던 미국 기독교가 유럽으로부터 밀려오는 고등비평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등 현대사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대사조를 가속화시킨 것은 미국 사회와 산업 구조의 변천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은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죠지 말스든(Gerge Marsden)이 근본주의대 현대주의 논쟁 시대라고 통칭하던 1870년부터 1925년까지의 기간동안 미국의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고수하려는 공동체와 현대사조와 보조를 맞추려는 공동체로 뚜렷이 이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전자를 가리켜 구복음주의 또는 근본주의자라고 칭하고 후자를 현대주의라고 부른다.  근본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신학사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현대화되고 세속화되고 있는 사회와의 단절을 추구하면서 정통신앙을 담대하게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 현대주의자들은 현대 과학, 사조에 기독교를 조정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상황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개인구원을 강조했던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당대의 조류와 문화 속에서 기독교를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개인구원보다는 사회복음을 강조하는 사회복음 주창자들이 되었다. 한편 근본주의 와 현대주의 논쟁의 열기가 식어가던 1930년대 이후 미국은 이상하게도 사상적인 공백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사상사적 공백을 대신한 것이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중도노선을 달리려고 했던 신정통주의였다. 그후 30년동안 신정통주의가 미국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적어도 1930년대까지는 근본주의, 현대주의, 그리고 신정통주의가 미국 기독교 지성사의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II. 한국신학사상의 조류

 

         이처럼 미국 기독교 지성과 사회가 변혁을 맞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엽 격변의 시대에 한국 선교는 시작되었다. 자연히 정통주의적 보수주의, 현대주의, 그리고 그들 사이에 중도노선을 추구하는 진보주의가 선교초기부터 한국신학 사상사 속에서 세개의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구 특별히 북미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큰 무리없이 한국 감리교에 수용, 소개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감리교는 현대주의적 신학사상의 맥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자연히 감리교 선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현대주의 사상의 선구자가 되어왔다. 이와는 달리 장로교 선교회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에서 보수주의 집단을 주도하던 미국의 구학파 출신들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으며 이것이 자연 스럽게 선교지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무디의 전통을 이어받은 부흥운동적인 근본주의가 한국 장로교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장로교 선교회 안에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출신의 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카나다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구학파 전통의 보수주의자들과 감리교의 현대주의 선교사들과의 중도적인 입장을 걷고 있는 진보주의 사상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선교 초창기부터 보수주의, 현대주의, 그리고 진보주의 세 가지 사상적인 조류가 한국의 선교 현장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자연히 세 종류의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은 한국 교회에 반영되어 한국교회 신학사상의 원형이 되었다.

        외국 유학을 갔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1920년대 후반부터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오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이들은  미국 프린스톤과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7년에 귀국한 박형룡박사,  프린스톤과 예일에서 학업을 마치고 1929년에 귀국한 백낙준박사, 일본의 청산학원과 프린스톤, 웨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30년대 초에 돌아온 김재준 목사, 김재준 보다 앞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프린스톤, 웨스턴, 덴버에서 학업을 마친 송창근목사, 그리고 미국 에반스톤에 있는 게렛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정경옥 목사등이다. 선교현장에 나타난 세 개의 사상적인 조류는  이들 한국인 신학자들을 통하여 구체화되어 정통주의, 문화-자유주의, 그리고 진보주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뿌리 내려진 신학전통이 이들에 와서 하나의 한국 신학사상으로 형성된 셈이다. 구학파의 변증학적 정통주의는 박형룡에게, 문화변혁및 토착화를 강조하는 현대주의는 정경옥으로 이어지면서 문화-자유주의로 정착되었고, 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카나다 선교사들의 진보주의 사상은 김재준, 송창근,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들 보다 앞서 1920년에 돌아온 김관식에게 계승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에 한국의 기독교 사상의 주도권이 선교사 중심에서 한국인 중심으로 이전되었다.

 

A. 변증학적 정통주의

        구학파 전통에 선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된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평양신학교를 통하여 형성된 구학파의 정통주의가 박형룡박사에 와서 한국적인 형태로 체계화된 것은 그의 신학교육의 배경을 살펴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프린스톤이 교과과정을 재개편하기전인 1923년부터 26년까지 프린스톤에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로 널리 알려진 당대의 보수주의 거장 메이첸 밑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구프린스톤의 변증학적 전통과 반현대주의 사상을 전수 받았다. 평양신학교에서의 교수활동과 그의 「현대신학난제 선평」은 그를 정통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만들기 에 충분하였다. 이런 신학적인 배경은 그의 사상을 특징지워 주었던 것이다.

 

B. 문화-자유주의

        한편 일찍이 개방주의 신학사상을 표방하면서, 신학적 전통이나 신학적 보수주의 보다는 복음의 문화 변혁을 추구하던 감리교의 신학 사상은 정경옥에 와서 문화-자유주의 신학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은 객관적 계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의 산물로 보았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게렛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 그의 스승 롤(F.H. Rall) 교수로부터 경험주의 신학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고 그 사상에 물들었다. 롤 교수의 신학은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주의 신학과 리츌의 윤리 신학을 적절히 절충한 것이었다.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라는 두 가지 모토와 함께 1930년대 감리교 교리적 선언이 보여주듯이, 정경옥의 감리교는 신학적 보수주의와 정통주의를 강조하던 장로교와는 달리 이 세상 속에서의 문화적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자유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미국 현대주의자들과 같이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기독교를 상황화, 토착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화의 모습은 일찍이 감리교회 신학사상의 선구자 최병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감리교 기관지 「신학세계」에 오랫동안 실렸던 “신학변증론”에서 최병헌은 “기독교 역시 종교로서는 세계 제 종교의 하나”이며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연속성”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한국의 전통종교인 유교와 기독교를 접목시키려고 했던 최병헌의 교회의 토착화는 문화변혁이라는 감리교 신학사상의 중요한 원형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대화는 오랫 동안 감리교 신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런 토착화 신학은 1960년대 이후 발흥한 문화-토착화 신학의 방향 설정 기준을 제공한 원형이 되었다.

 

C. 신정통-진보주의

        이 1930년대 한국에는 장로교 구학파 전통의 근본주의와 감리교의 문화 자유주의의 중도 노선을 추구하려는 또 하나의 신학사조가 존재하고 있었다. 구학파 전통을 계승한 선교사들, 평양신학교, 길선주, 박형룡으로 대변되는 장로교 정통주의에 반대하는 김재준과 그의 동료들에 의하여 형성된 장로교 진보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카나다 선교회와 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의 사상적인 맥을 계승한 셈이다. 이들은 1930년 미국에서 발흥한 신정통주의와 바르트주의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 진보주의자들이었다. 1930년대 한국 장로교회는 김재준을 비롯 신학적 변혁을 추구하는 이들과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려는 자들과의 논쟁이 총회로 비화되면서 한 차례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소용돌이는 1935년부터 강화된 일본의 신사참배 문제로 정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결말없는 논쟁으로 유보되었다.  1938년의 평양신학교 폐교와 1940년의 조선신학교 설립은 한국교회 신학사상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보수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주도적인 지도자들이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 보수주의는 지도력의 공백을 맞았고 영향력은 급격히 상실되고 말았다. 반면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서서히 세력을 모으면서 한국 교계의 중요한 세력으로 발흥하고 있었다. 때문에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은 보수주의에서 진보주의 경향으로 신학적 흐름이 변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연합하고 해외에서 지도자들이 돌아오면서 한국교회 특별히 장로교회는 다시 한번 근본주의대 현대주의 논쟁에 휩쓸렸고 그 중심에는 박형룡과 김재준 박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 말까지 한국교회는 사상적인 맥을 중심으로 박형룡, 김재준, 정경옥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진보주의, 문화-자유주의 공동체로 대별되었다.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변증학적 정통주의는 예수교 장로교에서, 김재준을 중심으로한 진보주의는 기독교 장로회에서, 그리고 최병헌, 정경옥의 사상을 잇는  문화-자유주의는 감리교에서  그 교단을 특징짓는 사상적인 맥을 형성하였다. 이들 세개의 공동체는 협력과 연합을 통해 한국 기독교 발전을 모색하기 보다는 교세 확장과 내부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만 급급하였다. 6.25 이후의 사회및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이 한국교회에도 반영되면서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 성경관, 교권문제로 1950년대에 수차례의 분열을 거듭하였다. 1930년대 미국교회가 안고 있는 똑같은 분열현상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 분열, 특별히 1950년대에 장로교 안에서 발생한 분열은 전통적인 신학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현대사조에 한국기독교를 조정하려고 하는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보수주의 대 진보주의 논쟁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III. 정체성 인식과 신학사조의 변천

 

        196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기독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이전까지 교단중심의 신학사조가 1960년대 이후에는 정체성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면서 한국신학사조는 변천을 맞게 되었다. 한국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 그리고 걷고 있는 길을 반추해보면서 제 삼의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대체로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 복음주의, 그리고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변증학적 정통주의 세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A.  1960년 이후의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

 

        기독교의 한국화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1950년대 후반부터 감리교신학대학의 문화-자유주의, 한국신학대학의 진보주의, 그리고 후에 연세대학 신학대학의 공동체안에서 일어났다. 토착화 신학 운동을 촉진시킨 요인은 여러가지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한국에 뿌리내린 전통주의가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 및 수입신학을 주창하면서 경직된 정통주의를 고수하려는 데에 대한 반동이었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서구에만 의존한다는 것이 “반기독교적,”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 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교회는 주체성을 망각한채 서구신학자들에게” 의존하였다고 보았다.  둘째는 당시 해방신학등 남미의 토착화 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국의 시대적 배경 즉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1930년부터 형성된 김재준을 중심으로한 한신의 진보주의 공동체와 최병헌, 정경옥 사상을 계승한 감신의 문화-자유주의자들은 1960년대 이후에 이 토착화 신학을 중심으로 공동전선을 폈다. 그 둘은 약간의 상이한 신학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학의 한국화, 한국사상의 기독교화를 추구한다는 토착화의 과업에 있어서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떤 방향에서 토착화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랐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토착화는 세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감리교 신학대학을 중심으로한 문화-토착화, 한국신학 대학의 정치 사회참여의 토착화, 그리고 연신의 기독교 민족주의 토착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토착화의 양상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한국화라는 원칙적인 면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의 한국 토착화 운동은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유동식, 윤성범 교수와 조심스러운 우려를 나타내는 전경연, 박봉랑, 박봉배, 이종성, 한철하 교수등으로 대별된다. 윤성범 교수에 따르면, “한국적 신학은 한국적인 실존과 한국적인 상황, 다시 말하면 한국적인 문화적, 정신적 전통에다가 서구적인 신학적 전통을 가미함으로써 우리의 전통이 다시금 살아나게 하는 것이 한국적 신학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토착화 신학의 두드러진 실례가 1970년대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성의 신학, 문화신학 그리고 민중신학이다. 그러나 토착화 논쟁이 진보-자유주의 사상을 대변하던 기독교 사상지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그보다 10여년이 앞선 1962년부터이다.

        1962년에 유동식 교수는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국인을 위한 선교적 동기에서 토착화를 제창한 유동식교수의 글을 전경연교수가 「신세계지」에서 논박함으로써 불꽃 튀기는 토착화 논쟁이 1963년에 발생하였다.  토착화의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 선교가 실현되었으며, 복음은 선교지의 고유한 개념과 표현양식을 통해 토착화하여 왔다는 유동식 교수의 주장에 대해 전경연 교수는 “신앙의 독자적 자기 표현,” “복음과 민족전통과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성격형성의 과제로서의 토착화 문제”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기독교 복음 자체는 전파되는 선교지의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을 표현하는 양식은 효과적인 복음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고려되어질 수 있고 또한 고려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신앙 자체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그 문화 속에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해에 윤성범 교수는 “환인 환웅 환검은 곧 하나님”이라고 제창하면서 한국전통문화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개념을 기독교의 하나님의 개념과 동일시하여 “하나님의 세계적 성격”을 주장하였다.  그 다음해 윤성범 박사는 「기독교와 한국사상」이라는 저술을 출판하여 한국의 전통문화 특별히 건국신화와 기독교 신앙을 접맥시키려는 종합적인 시도를 하였다. 윤성범 교수의 글을 논박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단군신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민족 문화나 전통이나 신화는 기독교 계시와 단절되며 성서만이 기독교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박봉랑 교수의 글이 사상계에 실리면서 토착화 논쟁은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

        유동식 교수와 전경연 교수의 토착화 논쟁은 이장식교수가 “그리스도교 토착화는 역사적 과업”이라는 논문을 「기독교 사상」지에 발표함으로써 그 열기를 가속화시켰다. 이 논문은 유동식 교수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전경연 교수의 조심스러운 토착화 입장을 일축한 것이다. 이 글에서 이장식 교수는 기독교 역사는 곧 선교와 토착화의 역사라고 보았다. 토착화론은 기독교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를 역사적인 종교로 만드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음의 특수성을 보편화하는 것이 선교요 토착화 운동이므로 기독교의 한국 토착화는 기독교의 보편성을 왜곡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기독교의 유일무이한 진리를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한국 토착은 그리스도교의 세계성의 확대운동이다.”  한국의 토착화 운동은 기독교 철학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틀을 형성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한국신학대학의 철학교수였던 이규호 박사는 「기독교 사상」에 발표한 “토착화의 철학적 근거”에서  한국의 기독교 토착화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며 세계문화에 공헌할 보편적인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서양문명의 옷을 입고 전래된 서구 기독교의 비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어 “한국 땅에서 복음 활동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복음이 우리의 진리,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는데에 토착화의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1960년대 쟁론이 일기 시작한 토착화 신학 운동이 1960년대 후반에 오면서 토착화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의 한계를 논하는 학문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급진적인 토착화론의 주창자들이 자체내에서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런 비판은 이종성, 박봉배등의 글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박봉배 교수는 “자연적 인간이나 재래적 문화를 아주 부정적으로 이해하려는” 배타주의(exclusivism)나 “모든종교를 종국적으로 아무런 심각한 대립도 없이 하나로 종합”하려는 상대주의(relativism)를 동시에 우려하면서 “토착이란 복음의 빛이 토착 문화에 비추어 새로운 방향을 밝혀주고 복음의 누룩이 발효하여 토착 문화의 발전적인 자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H. Richard Niebuhr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말한 변혁주의(transformationism)를 토착화의 이상적인 신학적 방안(scheme)으로 제시하고 있다.  조종남 박사와 한철하 박사도 신학의 한국화를 추구하는 토착화론이 종교혼합주의나 종교절충주의가 되어서는 안되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1970년대에 와서 토착화 운동은 구체적인 신학적 틀을 갖고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60대의 토착화 운동에 주도적인 이들이 역시 70년대에도 토착화 운동을 주도하였지만  10여년동안 토착화 신학은 내외적인 비판과 협력을 통하여 나름대로 발전을 한 것이다.  윤성범 교수는 자신의 토착화 사상을 정립하여 한국적 신학을 위하여 “誠의 신학”이라는 토착화 신학을 제창하였다. 그의 誠의 신학은 “이론적으로는 율곡의 사상을, 실제적으로는 충무공의 생활”을 신학의 형태로 삼았다. 그가 이 두 사람을 誠의 모델로 삼은 것은 “誠이 바로 그들의 생의 알파요 오메가 즉 처음이요 나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誠은 곧 계시를 의미한다. “첫째로 한국적인  ‘誠’의 개념은 서구신학에서 말하는 ‘계시’와 동등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 계시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誠의 개념 밖에 없다고 하겠다.” 윤성범교수가 말하는 誠은 계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誠’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참 말씀이며,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誠은 한국 사상과 문화의 바탕과 원리이며 동양에서는 보편적으로 통하는 보편적인 원리이다.  결론적으로 그가 말하는 誠은 곧 하나님이다. 그는 誠의 신학이 종교혼합주의 색깔을 띄게 된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종교혼합주의를 떠나서는 복음의 씨가 토양에 토착될 수 없기 때문에” 윤성범 교수는 복음의 한국적 표현을 위한 토착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혼합주의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그의 “‘誠의 신학’은 한국의 신화를 비롯해서 원시종교는 물론이요 유, 불, 선 3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있다.  70년대의 윤성범의 誠의 신학은 토착화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종성 교수와 김의환 교수를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誠의 신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성의 신학의 가능성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기독교계 안에 일고 있었다.

        그 형태와 양상, 그리고 방법은 달랐지만 전통문화와 기독교 복음과의 융합을 모색하려는 토착화 움직임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박종천의 토착화 신학과 민족의 통일을 연계시키려는 시도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한국 토착화 신학의 대명사격인 민중신학이 한국 토착화 신학의 한 유형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이다. 민중신학은 한국신학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는 서남동, 안병무 박사가 있었다. “예수와 오클로스”라는 글에서 제시한 안병무의  “민중 구원론”은 민중신학의 신학적, 성서적,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인류의 해방자 예수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제공하는 실존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던 안병무의 사상은 민중신학의 신학적, 정치적, 사회적 원형을 제공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교계에는 좀 생소한 과정신학이라는 토착화 신학의 한 유형이 토착화운동의 붐을 타고 한국교계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토착화 신학의 학문의 폭을 넓여 주었다.  1975년에 󰡔신학연구󰡕지에 김경재의 “과정신학의 신론에 관하여”라는 글이 실리면서 과정신학을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과정신학의 선구자들인 Russell Pregeant, John Cobb, R.C. Neville, 그리고 Schubert Ogden의 신학사상이 「실존」, 「세계와 선교」, 「기독교사상」, 「신학세계」, 「신학연구」등의 신학지를 통해 활발히 소개되면서 과정신학의 체계와 한국신학 형성을 위한 가능성이 토착화 신학계의 일각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을 추구하던 토착화 운동이 타종교와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국에서의 문화선교신학의 과제”를 다루려는 움직임이 토착화 신학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 일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변선환 교수이다. 변선환 교수는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융합을 시도하여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독교의 유일성이 무너지고 기독교는 이제 많은 지구상의 종교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종교혼합주의가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소수의 신학지가 토착화 논쟁의 광장 역할을 하던 것과는 달리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독교사상」은 물론 「신학전망」, 「사목」, 감리교신학대, 목원대, 한신대, 연신대의 각종 학보 등 많은 신학지들에는  토착화 문제가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토착화 신학의 “가능 근거”들이 제시되었고 구체적으로 토착화의 “유형”이 논의되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토착화 움직임은 토착화의 오랜 선구자였던 캐톨릭안에서도 강하게 일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相生의 신학”이 토착화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90년에 박종천이 「기독교사상」에 “단군신화의 상생 이념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상생신학은 토착화 학계에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논문을 정리하여 상생의 신학 방법과 원리를 밝힌  「상생의 신학」이라는 저술을 한국신학연구소를 통하여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30여년전에 윤성범 교수가 제창한 단군신화의 기독교적 해석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1980년대부터 한국신학연구소는 1960년대부터 토착화 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사상지」와 함께 한국적 신학을 모색하려는 토착화 신학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 사상」에는 91년에 6월과 7월 두차례에 걸쳐 토착화 신학 논쟁의 평가와 전망이라는 특집이 실렸다. 한국의 기독교계에 일어난 다양한 토착화 형태의 신학을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앞으로의 전망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착화 신학을 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B. 복음주의 운동의 발흥

 

        이런 토착화 운동은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인상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다. 토착화 운동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복음을 떠나 극단으로 흐르면서 한국의 토착화 운동과 토착화 신학에 우려를 나타내는 이들이 1970년대부터 교단의 울타리를 초월하여 범교단적으로 일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극단적인 좌측으로 흐르는 기독교의 토착화 운동에 우려를 나타내면서 다른 한편으로 폐쇄주의로 흐르는 한국의 보수주의를 함께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1960년대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생성된 또 다른 신학 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이다.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 중에 한국의 보수주의가 1950년대 이후 지나치게 분리주의, 반지성주의, 폐쇄주의로 흐르고 있음을 염려하면서 신학적 보수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문화적인 책임을 완수하려는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토착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복음을 상황화시켜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켰다고 느끼고 있던 지도자들이다. 소위 근본주의 공동체에 있었던 이들 가운데 복음주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던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토착화를 추구하는 공동체 안에 있었던 이들 중 복음을 지나치게 상황화시키는 토착화 신학에 우려를 표방했던 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초월하여 1970년이후 복음주의라는 공동체가 한국 기독교 안에 형성되었다.  이들은 교단을 초월하여 복음주의라는 이름하에 한데 연합하였다.  KEF, ETS, CCC, Navigator, IVF 등의 단체와 생명의 말씀사, 엠마오, 두란노 서원등 일련의 출판사는 복음주의 저술 활동, 선교, 학원복음화를 통하여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촉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복음주의 신학회는 매년 정기 학술발표회를 갖고 「성경과 신학」이라는 학술지를 1983년부터 정기적으로 간행하여 한국기독교계에 복음주의를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이들은 복음주의 관점에서 폐쇄주의로 흐르고 있는 한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을 변질, 왜곡하고 있는 민중신학을 동시에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까지 전통적인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복음주의 공동체로 자연히 흡수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한국교회에는 정통주의를 표방하면서 폐쇄주의로 흐르고 있는 근본주의 공동체가 여전히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때문에 1990년대 초반 현대 한국 교회안에는 민중신학등 토착화 신학을 통하여 문화 변혁을 추구하려는 문화-자유주의, 보수주의 신학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복음주의 공동체 그리고 전통적인 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려는 근본주의 공동체가 한국 기독교를 주도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 한국 신학사조를 형성하던 변증학적 정통주의, 진보주의, 문화자유주의가 1960년대 이후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변증학적 정통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문화-토착화, 정치 사회토착화(민중신학)와 민족주의-토착화를 포함한 자유주의-토착화 신학등 세개의 사조로 수정 전환되었던 것이다.

 

VI.맺는말:자유주의 토착화신학의공과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교회의 신학사상을 특징지웠던 세가지 사상적인 조류 속에서 토착화 신학을 주도했던 문화-자유주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한국의 자유주의 토착화 운동은 한국 기독교 발전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두가지 면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긍정적인 면은 한국신학을 모색해야된다는 신학함(doing theology)의 필요성과 거기에 대한 과제를 환기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긍정적인 면은 학문성에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다양한 세계의 학문적 조류를 수용했고 그것을 한국 기독교에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각종 국내외 학술대회, 학술 쎄미나, 저술활동, 그리고 「기독교사상」등 학술지를 통한 최근 30년 동안의 학문 동향의 소개는 학문의 발달을 고취시켰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이 W.C.C.의 지원을 받아 학문적인 발전을 모색하였고 그리고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어느정도 학문성을 촉진시켜 폐쇄적인 한국 기독교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심지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신학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 운동은 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진정한 기독교 문화가 기독교의 발전과 함께 병행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생명력과 활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 형성은 요원한 것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문화-토착화 신학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한국에 맞는 기독교 문화관과 세계관을 정립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시켜주었다. 성서적 기독교 문화관은 복음과 전통문화와의 무조건적인 융합이 아니고(Christ in Culture), 복음과 문화의 대립(Christ against Culture)도 아니며, 복음을 통한 문화변혁(culture in Christ)이어야 한다는 복음주의적 문화관과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토착화 신학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주체성 확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민족주의, 특별히 기독교의 민족주의는 토착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민중사관과 민족주의 사관 역시 어느 정도는 토착화 운동의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 교회와의 교류, 세계조류 속에 한국 기독교를 바라 보도록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강조했던 세계조류라는 것이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조류들만을 강조하고 소개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세계 교계와의 교류를 강조한 만큼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지만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자유주의는 몇가지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복음의 지나친 상황화이다. 원래 출발했던 관점, 즉 복음을 통한 문화변혁의 개념이 포기되고 문화를 통해 기독교를 조명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것이 1960년대 이전의 진보주의자들과 1960년대 이후의 토착화 운동을 주도한 자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1960년대 이전에도 감리교를 중심으로 복음의 토착화, 문화를 통해 기독교를 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1970년대 이후 토착화 신학이 성의 신학, 민중 신학, 풍류신학, 과정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흥하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와 전혀 이질적인 민족 종교와 전통을 접목시키려고 시도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본질을 변질, 왜곡시키고 말았다. 복음의  한국적 표현이란 한국사상의 기독교화가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말과 사상과 표현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당대의 문화와 사회 속에 호소력이 있는 생명력 있는 신학이 되기 위해서 복음은 진리 자체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문화 속에 표현되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한국적 표현은 필요하며 그리고 반드시 이룩되어져야 할 과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토착화 신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두번째 두드러진 약점은 한국자유주의 신학이 반동주의적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신학을 출발할 때 보수주의를 공격하면서 신학의 출발점을 삼고 그 속에서 신학의 소재를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1950년대에 두드러진다. 사실 똑같은 현상이 보수주의 쪽에서도 있다. 이것은 한국의 신학이 이데올로기화하여 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번째 약점은 칸텍스트를 극대화한 나머지 텍스트를 약화시키고 말았다. 민중신학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context를 극대화한 나머지 기독교의 본질을 제공하는 text를 극소화 또는 무시하는 과를 범하고 말았다. 민중신학자들은 가진자와 없는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착취자와 피탈자,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기독교라는 이원론적인 구조속에서   복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text를 통해 context를 조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context를 통해 text를 이해하려는 누를 범하고 말았다.  사회, 정치, 경제적 해방을 구원의 본질로 이해하여 구원의 개념을  영적인 구원을  떠나 물질적이고, 현세적, 현상학적인 구원 개념으로 대치시킴으로써 구원의 본질을 이질화시키고 말았다.

        네번째 약점은 종교 혼합주의 현상이다. 토착화 신학이 발흥하면서 종교 혼합주의를 추구하다보니 기독교의 유일성이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신론의 변화는 자연히 구원론의 변화를 초래하여 기독교를 성경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초대교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비롯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들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로고스 신학을 통해 역사 속에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기독교의 유일성을 평가절하시키고 기독교를 헬라철학과 융합시키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보다는 복음의 본질을 변질, 세속화시켰다. 우리는 똑같은 실례를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에게도 발견한다. 유동식 교수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토착화의 개념은 결코 혼합주의일 수는 없다”고 선언했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한국의 토착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실로 이땅에 기독교를 토착화시키는 일은 기독교의 세속화를 의미함보다는 도리어 이 땅의  생활 방식의 세속화를 막기 위함”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은 “초월적인 진리”를 “개별적인 현실” 속에 내재시켜 기독교의 유일성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상의 기독교화를 추구한 나머지 종교 혼합주의를 잉태시켰다.  윤성범 교수는 자신의 誠의 신학이 리차드 니버의 도식- 혼합주의( syncretism), 발전(development), 변혁(transformation)- 가운데 첫째 것에 해당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장식 교수도 토착화란 문화적인 융합을 모색하기 때문에 “종교혼합 현상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프랑크프르트 선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종교적 혼합주의는 반기독교적이다. 기독교는 결코 혼합주의일 수는 없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2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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